소개글
"막부의 유학 도입과 그 반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머리말
2.호레키 사건의 전개
3.근세 막부와 천황의 관계, 그리고 유학의 도입
4.유학의 변용-존왕사상의 등장
5.맺음말
본문내용
1.머리말
일본사에서 가장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고, 또한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역사는 단연, 일본을 지금의 위치로 만들어준 1867년 왕정 복고-천황 중심을 특징으로 하는 ‘메이지 유신’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를 살펴보면 천황의 권위는 고대 이래 종교적, 학문적, 의례적 분야만을 담당하거나 역사의 주 무대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비추어볼 때, 근대 초 천황의 전면적 재등장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의미의 천황의 재등장은 이미 100여년 전부터 그 사상적 기반이 싹트고 있었고 그런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호레키 사건’이다. 이 글에서는 호레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에도 막부와 천황가, 유교의 관계를 살펴보고 그것이 근대 초 일본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막부의 유학 도입은 정권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유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일본적 신도와 결합하며, 종래에는 그 막부를 무너뜨리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주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2.호레키 사건의 전개
다케우치 시키부는 1712년에 태어나 1728~1729년 무렵 교토로 상경하여 야마자키 안사이를 학조(學祖)로 하는 기문파의 인물들에게 스이카 신도와 유학을 익혔다.
< 중 략 >
하지만 아마테라스를 흠숭하는 신도의 존재와 당시에도 존속해있던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만세일계의 천황의 존재는 유교의 속성인 충(忠) 사상이 발전했을 때, 또한 막부의 정치가 느슨해지고 힘을 잃어갈 때 ‘천황’에 대한 존왕 사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최초의 사건이 ‘호레키’ 사건이었다. 물론 이것은 막부와, 막부와 연계된 섭관가의 탄압으로 철저히 좌절되었지만, 그 기저에 있던 사상은 이어지고 더욱 발전하였고, 막말 막부타도 운동과 함께 천황이 그 대체자로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막말 왕정복고 운동의 복선으로 호레키 사건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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