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 최초 등록일
- 2011.06.24
- 최종 저작일
- 2010.05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메이지유신 정리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일본의 근대국가형성-복고와 혁신
근대 일본의 국가만들기는 700여 년에 걸친 무사 계층의 지방 분권적 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중앙 집권제적인 국민 국가 만들기로 이행해 가는 과정이었다. 막번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메이지 지도자들이 시행착오 끝에 착안했던 것이 서구 열강을 모델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 일본’의 건설을 목표로 내세우면서 국가 통합과 국민통합의 방식은 고대 일본에서 형식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복고를 통한 혁신이란 일견 모순되는 두 요소를 근대 국가 만들기의 양 축으로 선택하게 하였고 그 통합의 상징으로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다.
여러 개혁 정책에 대한 일반 인민들의 무력봉기(잇키)를 경험한 정부는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71년 사쓰마, 조슈, 도사번의 병력 약 1만여명으로 중앙군을 구성하여 무력을 확보한 다음 7월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였다. 전국 지방 행정 단위를 부현제로 변경하고 부지사, 현령을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행정 단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또한 형식적인 신분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다이묘와 상층의 공경을 화족으로, 일반무사를 사족으로 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철폐하고 천민까지 포함하여 평민으로 삼는다는 사민 평등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인구의 80% 이상을 점하는 평민에게 호적 제도를 실시하여 성을 부여하고 직업 선택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조치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회 구조적인 차별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한편 사민평등의 조치는 근대적 조세 제도의 확충 및 국민개병제에 근거한 징병 제도를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징병제도는 먼저 1872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천황의 이름으로 징병고유를 발표하여 근대적 상비군 제도의 설치에 이르게 되었다. 전국의 군사권을 병부성에 귀속시키고 1873년 국민개병제에 근거한 징병령을 공포하였다. 사족, 평민에 관계없이 만 20세의 남자는 모두 징병 대상이 되어 신체검사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