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속 충주
- 최초 등록일
- 2020.06.03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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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왕조실록 속 충주"
조선왕조실록 속 충주에 관한 기록을 통해 충주지역을 연구한 내용
목차
Ⅰ. 요약서
1. 내용요약
Ⅱ. 본론
1.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충주의 지역적 위상
가. 조선의 행정구역 속 충주“목(牧)”
나. 대한민국 충주“시(市)”
다. 조선 충주“목(牧)”
라. 대한민국 중심 고을 충주“목(牧)”
2. 수운(水運)교통의 중심 고을 충주
가. 조선의 조운(漕運)제도와 남한강
나. 덕흥창과 경원창
다. 가흥창을 통해 본 충주목의 위상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Ⅰ. 요약서
1. 내용요약
‘대한민국중심고을, 충주’
우리지역의 슬로건이다. 무조건적인 지역적 자부심을 일으키기 위한 문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로건을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중심‘도시’가 아닌 대한민국중심‘고을’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현재의 용어가 아닌 과거의 용어를 사용해 놓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한국사 수업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지역 충주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주요 지역이었다는 것은 종종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과연 우리지역 충주는 과거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혹은 어떠한 요인으로이건 정말 주요한 지역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우리지역 충주를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충주시는 지방중소도시에 불과한 지역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충주는 충주‘목(牧)’으로서 행정지역단위로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목(牧)’이라는 행정단위는 당시 약 20개 정도도 되지 않은 지역만이 해당되었다. 인구수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당시 조선 전체 고을 중 4번째에 해당될 정도였다.
조세수납이라는 기준으로 보아서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당시 조세운반, 조운제는 지방의 주요지역에 조창을 두어 수도 경창으로 옮기는 시스템이었다. 충주에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덕흥창이라는 조창이 있었고 이후 경상도 지역 수납을 위해 경원창이라는 조창이 추가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화재로 인하여 가흥창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하였고 당시 가흥창은 조세 수납규모로 조선 조창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렇듯 조선시대 충주‘목(牧)’은 현재의 충주‘시(市)’에 비해 지역적 위상이 대단히 높은 고을(도시)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Ⅱ. 본론
1.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충주의 지역적 위치
우선 조선왕조실록 사이트를 통해 우리지역 충주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았다. 무려 1,233건이나 검색이 되었다. 검색되는 모든 사료를 읽어보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참고 자료
김돈,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4, 조선전기, 가람기획
박평식 외,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조선후기, 가람기획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지식산업사
도면회 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비상교육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encykorea.aks.ac.kr/)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 )
디지털충주문화대전 ( http://chung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http://db.histor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