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일생과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6.05.08
- 최종 저작일
- 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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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운형의 일생에 관해 줄글로 서술하고 후반부에 간략하게 평가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묘곡에서 자랐다. 묘곡은 무덤 근처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씨 가문이 근 200여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어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씨 가문의 배경은 여운형의 조부 형제 대 부터 동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당시의 동학은 소위 이단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이를 믿는 사람을 참혹한 처벌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여운형의 조부인 여규신(呂圭信)은 동학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이는 그 당시 어린 나이였을 여운형에게도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뿐 아니라 여규신은 중원(中原)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북벌론을 강력히 주장해 어린 여운형의 가치관 형성에 크게 관여하였다. 반면 부친 여정현(呂鼎鉉)은 조부와 다르게 완강한 계급주의자로, 상민이나 노예를 짐승 취급하는 행태가 빈번했다. 여운형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인내심,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등 자신을 발전시키는데 더욱 정진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낸 여운형은 이후 15세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으나 1년도 못 되어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로 옮겼다. 이후 우무학당으로 옮겨간 여운형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첨단 기술인 전신기술을 배웠고 우무국 기술관, 즉 지금의 전신통신사와 같은 직책도 제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높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는데 이 때 여운형의 나이 20세가 되기 전이다. 또한 그는 이후 아버지와 아내를 여의고 자신이 가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노비들을 해방시키는데 이를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평등주의적 사상, 계급주의에 대한 죄책감, 동학의 사상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훗날 여운형의 정치적 의식 기반이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시기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민영환이 자결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는 이러한 현실에 크게 분노하며 향리의 각 곳을 순회하며 민영환이 자결한 이유를 포함한 내용을 연설했다.
참고 자료
김대중 외 11명, 『여운형을 말한다』, 아름다운책, 2007.
이기형,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
이정식,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정병준, 『몽양여운형평전』, 한울,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