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
- 최초 등록일
- 2012.06.19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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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요
2. 관직
3. 학문
4. 저술
5. 주요 유적지
① 옥산서원
② 독락당
본문내용
1. 개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 호는 회재·자계옹. 참군 수회의 손자로, 생원 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로 계천군소의 딸이다. 초명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하였다(1491~1553)
2. 관직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중 략>
4. 저술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 곧, 구인록 (1550)·대학장구보유(1549)·중용구경연의 (1553)·봉선잡의 (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경전의 핵심개념으로서 인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하였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기는 계획을 하였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태도에 비하여 매우 창의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준다.중용구경연의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