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구
- 최초 등록일
- 2002.10.14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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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구의 일생은 한국근현대사를 대표한다. 19세기 후반 질풍노도와 같은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 김구는 청소년시절부터 배외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던 암흑의 시기에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민족의 자존과 민주체제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며, 광복 이후에는 우리 민족 자신에 의한 민족의 자주통일과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비극적으로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서거는 바로 그 자신의 비극이기에 앞서 민족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비극적 서거는 한국현대사의 전개에 헤아리기 어려운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의 서거는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주도세력이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많은 수의 항일애국지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순국하였고, 일제에 쫓기면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다행하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인사들도 분단과 혼란의 군정기에 권력투쟁과 이념적 갈등으로 평온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체제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로 일제식민당국의 앞잡이였던 경찰, 법조인, 교육자, 기업인, 행정관리, 언론인, 문화인 등등의 친일세력들을 다시 채용하여 미군정의 하부조직으로 충원하였고, 이에 이들 친일세력들은 건국과정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조직화 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안보를 위해서 친일세력의 숙정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드디어 친일세력을 정치적으로 충원하였다. 이것은 한국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을 심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에 의한 친일세력의 정치적 충원은 그 이후 한국정치체제의 '정통성위기'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열정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지도자는 김구뿐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백범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