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태학유관록
- 최초 등록일
- 2010.12.07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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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태학유관록을 읽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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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에 박지원이, 그의 나이 44세에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팔촌형이며,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 곳의 문인, 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다. 박지원은 견학과 유람을 겸하여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인 자재군관이란 역할로 동행하게 된다. 280명으로 이루어진 사신단 일행은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1일 북경에 도착 한다. 박지원이 북경에 방문했을 때 황제는 북경에 없고 청나라 황실별장이 있는 열하 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열하로 급히 가게 된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10㎞ 떨어진 작은 도시로 승덕의 옛 이름이다. 열하로 가는 길은 북경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청나라 황제들이 무더운 베이징의 여름을 피해 찾던 휴양지로 원래 이름은 열하이다.
열하일기 중 태학유관록은 8월 9일-8월 14일까지 열하의 태학에서 머물렀던 엿세 간의 기록으로 피서산장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박지원은 이곳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해 논평을 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열하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이유는 온천이 많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하여 만들어진 이름인데 열하는 사실 개울만큼 아주 작은 강이다. 옛부터 내려오는 중국 전설에 따르면 열하의 강물이 재물운을 불러온다고 하여 도박사를 비롯해서 부자가 되길 꿈꾸는 사람들이 손을 씻고 간다고 한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은 북경의 더위를 피해 열하에 피서산정을 만들어 4월에서 9월까지 여름 내내 이 곳에서 지내며 국사를 돌보며 머물렀다. 열하는 한 여름에도 섭씨 28도를 넘지 않아 하니 피서지로는 제격인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황제가 체류하던 저택인 피서산장이다. 명목은 피서이나 사실은 직접 변방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의 행궁으로 강희제가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황제들은 단순한 피서목적보다는 몽고족을 비롯한 주변 소수민족들을 통치하기 위해 이곳에서 6개월이나 지냈다. 피서산장 정문인 여정문에 몽골어 위구르어 만주어 등과 함께 쓰여 있는 것은 민족 융화정책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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