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대외관계와 수도
- 최초 등록일
- 2010.06.22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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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한국사길잡이, 한국사 특강 등의 내용을 빠짐없이 넣었습니다.
목차
Ⅰ. 발해의 대외관계
1. 발해와 신라의 관계 - 5단계
2. 당과의 관계(발해는 조공, 하정, 교역, 학생입학을 위해, 당은 왕의 책봉을 위해)
3. 일본과의 관계
Ⅱ. 발해의 대외무역
Ⅲ. 발해의 수도(五京)
※참고자료
본문내용
1. 발해와 신라의 관계 - 5단계
(발해-신라 교류기록 거의 남아있지 않음. 하지만 신라도를 거쳐 활발히 왕래하였을 것이며, 신라 국경도시 천정군에서 발해 책성부까지 39개 역이 운영되고, 신라가 교류의 창구인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쌓은 것은 이를 뒷받침함)1) 남북 교섭기(698~713) : 건국 과정의 20여년
- 발해와의 첫 접촉 : 고왕 3년경(700). 최치원이 당 소종에게 보낸 <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글>에서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자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5품 대아찬 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에서 알 수 있음.
- 당시 발해는 당으로부터 심한 위협. 이를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 구사. 발해는 돌궐에 이어 신라에 사신을 파견. 대아찬 벼슬을 받는 외교적 수모를 감수하면서 새 왕조 건설의 안전을 보장받음(신라와 당의 연결 방지).
2) 남북 대립기(713~785) : 발해의 정복사업 추진기로 무왕에서 문왕 집권 중기까지의 60여년
- 대조영 말기부터 대립관계로 전환 → 성덕왕 12년 발해와의 접경지인 개성에 축성
- 무왕의 대외정책은 매우 강경. 이에 신라는 성덕왕 20년 북쪽 경계에 긴 성 축성(발해와 군사 대결 의식). 직접적 충돌은 무왕 14년(732)의 당나라 공격 배경 : 돌궐의 간섭을 받던 흑수말갈이 돌궐약화로 당에 접근하고, 당이 흑수주 설치를 허락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해 무왕이 흑수말갈 정복을 추진. 이때 무왕 동생 대문예가 반대하여 실행되지 못함. 그는 당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정복 반대. 이에 무왕이 노여워하여 그는 당으로 망명, 당이 그를 보호하자 발해가 당을 공격함.
참고 자료
한국사(발해), 한국사 길잡이, 차용걸 교수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