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
- 최초 등록일
- 2009.11.22
- 최종 저작일
- 2007.05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훈구와 사림에 대한 정의와, 사화에 대한 연구 동향, 그리고 그들의 역사적 의미.
목차
Ⅰ. 훈구와 사림이란
- 훈구파(勳舊派)
- 사림파(士林派)
Ⅱ. 훈구와 사림 대립의 연구 등장 배경
- 사화에 대한 근대 이전의 연구
- 근대 이후의 연구 > 식민사관의 입장
- 근대 이후의 연구 > 붕당정치론의 제기와 사화에 대한 관심
Ⅲ. 훈구와 사림 대립의 경제적 배경
- 내재적 발전론
- 16세기의 경제적 변화 양상
- 사림이 훈구를 비판하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경경유착에 의한 경제적 비리.
Ⅳ. 훈구와 사림 대립의 정치적 이해
- 훈구의 탄핵과 언론기능의 강화
- 사화의 발생 ․ 극복 및 붕당정치의 성립
Ⅴ. 정리
본문내용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사림들은 언관기구만으로는 훈구 견제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음. 따라서 정책결정 과정 자체에서 공론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구조의 필요성의 제기로 낭관(郎官)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시킴. 사림들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낭관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갔는데 특히 낭관들의 자천제(自薦制)가 시행되면서 그 지위가 한층 높아짐. 이에 따라 낭관은 각 부서의 장관인 훈구를 견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
4) 기묘사화(己卯士禍) : 중종 대에는 낭관권의 형성으로 사림의 정치진출 및 활동이 확대.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진출은 이러한 변화에 기반한 것. 그들은 언관직과 낭관직을 장악하고 훈구를 적극 견제하면서 개혁을 추진해 나감. 그러나 사림의 개혁을 지원하던 중종이 자신의 주도권을 위기의식을 느끼고 훈신들과 결탁하면서 기묘사화가 발생함. 사화 이후 왕과 훈신들이 계속 결탁하여 사림들을 견제하면서 왕의 외척이 중재자로서 등장. 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외척세력은 훈구의 이해관계 대변하면서 권력을 독점하는 권신(權臣)으로서 등장. 이러한 권신들의 비리와 부정을 그러나 언관과 낭관층이 중심이 되어 계속 견제하였고 재야 사림 역시 공론을 형성하여 권신을 비판. 권신의 부정부패가 민의 저항까지 일으키자 더 이상 권심중심의 정치가 유지되지 못함.
5) 사림들의 재기와 붕당정치의 성립 : 명종 말기에 정치가 정상화되고 사림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공론정치가 본격화되기 시작. 공론정치가 정립되면서 이를 수용하여 새로운 정치운영 방식으로서 붕당(朋黨)정치가 성립됨.
Ⅴ. 정리
-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새롭게 변화하는 경제사회적 환경 위에서 더 발전적인 정치형태를 추구해 가는 정치 발전과정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참혹한 정치적 박해인 사화가 발생했지만, 이는 사림 추진의 개혁 강도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지표로 인식되며, 이를 극복하고 공론정치와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를 열어간 것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