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
- 최초 등록일
- 2008.09.08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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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95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팀이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묵재공파 문중에서 소장해 온『묵재일기』(1535~1567년) 10책을 수집해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고 탈초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서경대 국문과 이복규 교수가 3책 뒷장에서「설공찬전」 국문본의 일부를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한문소설 「설공찬전」의 흔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문일기책의 각 장 접힌 부분을 찢어 안의 여백에 이 작품을 적어 넣은 후 다시 봉한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저절로 열려 그의 눈에 띈 것이다. 설공찬전은 중종 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진 후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만 알아온 채수(1449~1515)의 한문소설로, 이것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추측으로만 논의되어 온 작품의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조선 최초의 필화(筆禍)사건을 일으킨 한문소설’로만 알고 있는「설공찬전」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최초의 금서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는지 궁금했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전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이 작품을 택한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채수의 생애와 사상
Ⅲ. 국문본『설공찬전』
1. 작품 개요
2. 구조와 소재
3. 탄압 이유
4. 국문본『설공찬전』에 관한 몇 가지 논란
5. 소설사적 의의
Ⅳ. 고전의 현대적 계승
Ⅴ. 결론
본문내용
우리는 ‘조선 최초의 필화(筆禍)사건을 일으킨 한문소설’로만 알고 있는「설공찬전」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최초의 금서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는지 궁금했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전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이 작품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은 작품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국문본만이 발견되었다는 것인데그래도 원본이 한문소설임은 확실하므로 우리는 국문본의 발견으로 설공찬전이 실존했다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내용을 일부분이나마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해서 한문 소설을 대표하는 『금오신화』에 이어 「설공찬전」도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채수의 생애와 사상이「설공찬전」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설공찬전」의 구조와 소재면에서의 특징을 고찰해 보겠다. 또한「설공찬전」에 관한 몇 가지 제문제를 알아보고 오늘날 「설공찬전」이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계승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설공찬전」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국문본 발견자인 이복규 교수에 의해 가장 심도있게 연구되어 왔으므로 본고는 이 교수의 논의를 중점으로 연구되었음을 밝힌다.
Ⅱ. 채수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채수의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懶齋)또는 청허자(淸虛子)이고 시호(諡號)는 양정(襄 靖)이며 관향은 인천이다. 비록 훈구파이기는 하나 가장 하위인 비거족(非鋸族)으로 분류할 만큼 그리 드러나지 않는 가문 출신으로 세종 31년(1449) 8월 8일에 한양 명례방(明禮坊) 본가에서 부친인 남양 부사 신보(申保)와 모친 문화 류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채수의 생애는 크게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제1기는 수학기로서 태어나서 18세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때는 주로 뒷날의 사회적 활동을 위해 수련을 닦은 시기이며, 최초로 귀신 체험을 하는 시기이기도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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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록,『민중문학사』, 도서출판 열사람, 1988
소재영,『기재기이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이복규 편,『설공찬전,』 시인사, 1997
이복규,『설공찬전 연구』, 도서출판 박이정, 2003
정병설,「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 바람」,『한국사 시민 강좌』 제37집, 일조각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m=all&articleID=b19j367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