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 최초 등록일
- 2006.11.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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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
Ⅲ. 부마 민주항쟁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Ⅳ. 결론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1979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그런데 여기서의 `특별`함이란 박정희 군부독재 권력의 18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에서이다. 즉, 1979년은 장기간에 걸친 군부독재의 탄압정치로 황폐화 되어 온 자유 민주적통치질서가 그나마 그 외피로서 마지막 남아있던 형식 합리성(제도 야당의 존재)마저 최종적으로 유린되었던 그런 한 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민주주의가 개선 · 정상화 될 어떤 정치적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 말기적 반동의 해 이기도 했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1979년 박정희 정권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중이던 YH 여공들을 폭력으로 해산 시킨 뒤 법원의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과 함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켜버렸던 것이다. 집권측은 이제 형식상으로도 야당의 존재를 인정 하지 않으려는 폭거를 자행하였고, 마침내 그 것은 국민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 부마항쟁의 발생배경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이다.
○ 언제? 1979년 10월
○ 어디서? 부산 및 마산
○ 누가? 학생과 시민
○ 무엇을? 반정부 시위
○ 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참고 자료
김하기/ 부마민주항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10.11
부산대학교 총학생회.「거역의 밤을 불사르라- 10월 부마민중항쟁사」. 1985
최장집·임현진 공편.『한국사회와 민주주의: 한국민주화 10년의 평가와 반성』. 서울: 나남. 1997.
1970년대 민주화운동, IV (NCCK인권위원회), 1763-1768쪽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년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