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과 부산
- 최초 등록일
- 2020.02.09
- 최종 저작일
-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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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3. 6월 항쟁
1) 6월 항쟁의 전개
2) 부산의 6월 항쟁
4. 관련 사료
5. 맺음말
6. 참고자료
본문내용
6월 항쟁은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아직까지도 하나의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박종철, 이한열과 같은 청년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비극으로 시작해 직선제 요구, 대규모의 시위,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국민적 운동을 통한 민주화의 쟁취까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매우 많다. 본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월 항쟁의 전개를 짚어본 후 여태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부산의 6월 항쟁을 다루고 관련 사료들을 읽어보고자 한다. 관련 사료에는 6월 항쟁에서 조직을 이루며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고 알려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6.10대회 결의문과 6.26대행진이 일어나기 직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의 사설, 6.26대행진에 대해 서술한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박종철(朴鐘哲)은 1965년 4월 1일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영남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남제일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부마 항쟁이 일어났는데 박종철은 당시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부마 항쟁은 그에게 사회의 모순을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4년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 후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87년 1월 13일 자정 무렵에 치아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수사관들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추궁했다. 그 과정 중 수사관은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결국 그는 고문을 받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참고 자료
최원석,「1987 6월 항쟁의 보루, 부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토론회 자료집, 2019), 35-46쪽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main
박종철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15201&cid=55787&categoryId=56663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95971&cid=46624&categoryId=46624
6월 항쟁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606&cid=43667&categoryId=43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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