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광해군의 평가
- 최초 등록일
- 2006.05.25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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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의 광해군의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와 인목대비와의 관계 및 갈등 그리고 그 밖의 역사 배경 상식등의 자료입니다.
조선실록 수업시간에 발표해서 좋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자료가 아주 많고 내용도 충실합니다.
보시면 후회 안하실겁니다^^
목차
광해군시대 주요 사건과 연표
광해군 소개
광해군의 대표적 사건
인목대비의 일대기
광해군과 인목대비
일화
광해군의 부정적 평가
광해군의 긍정적인 평가
일반 역사적 배경과 상식
본문내용
그런 와중에 선조가 갑작스럽게 죽는다. 선조는 죽으면서 광해군을 왕위에 즉위시키라는 서첩을 영의정 유영경에게 준다. 그런데 유영경을 소북파로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미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조의 서첩을 공포하지 않고 문갑속에 보관한다.
이렇게 해서 선조의 어명이 전해지지 않자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간다. 인목대비는 고심 끝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영창대군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 왕세자로 책봉된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결국 진상조서를 하겠다는 이유로 두 명의 관리가 명나라로부터 왔다. 이들이 조선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고 돌아간 뒤에야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이 겪었을 마음 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연이어 일어났던 여러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일화
①세자 책봉
조선시대 선조가 세자 책봉에 대한 일을 생각하다가, 여러 왕자들을 앞에 불러 놓고 그들의 슬기를 시험해 본 일이 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선조가 이런 질문을 하자, 왕자들은 별로 대수럽지 않게 생각하는 듯, 혹은 "떡"이라고도 하고, 혹은 "꿀이요", "고기요" 라고도 하는데 광해군의 차례가 되자, 그는 뜻밖에 "소금이올시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그 까닭을 물으니 "모든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맛이 나기 때문이옵니다"라고 광해군은 대답하였다. 선조는 이에 크게 만족하여, 그의 형인 임해군과 그밖의 여러 왕자들을 물리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②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태도
이미 아들이 세명이나 있었던 선조였지만 모두 후궁 소생이었던 지라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웠던 광해군 조차 선조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있었다. 영창 대군의 출생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하면,“명나라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도 말라.” 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광해군은 부왕의 푸대접을 삼키며 끓어 오르는 반항심을 누르고 있었다.
③광해군 부인 유씨와 인목대비와의 대립
광해군 부인 유씨 (문성군 부인 유씨) 는 1588년 (선조 21) 16세 때 두 살 아래인 광해군과 혼인하여 아들 셋을 두었으나 두 아들은 일찍 요절하고 외아들 지(祗)만 두었다.
유씨의 아들이 열 살이 되던 1602년 (선조 35) 51세의 시아버지 선조가 19세의 인목왕후 김씨를 맞이했다. 이때 30세인 유시보다 시어머니 김씨는 열한 살 어렸다.
당시 남편 광해군과 유씨는 세자와 세자빈으로 책봉된 상황이었는데, 1606년 인목대비 김씨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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