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중국혁명 속의 한국독립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09.1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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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혁명 속 한국독립운동 발췌요약본입니다
목차
1. 국공합작과 한인독립운동
2. 서안사변과 한인독립운동
3. 중국 공산당 이념 창시자의 한 사람: 한위건(韓偉健)
4. 중국 혁명 격랑 속의 조각배: 김산(金山)
5.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률성(鄭律成)
6. 2만 5천 리 장정의 선봉장: 양림(楊林)
7. 중국 홍군 포병부대의 창설자: 무정(武亭)
8. 중국 조선족사회의 개척자: 주덕해(朱德海)
9. 중국 ‘영화황제’: 김염(金焰)
10. 장준하가 만난 중경 임정
본문내용
1. 국공합작과 한인독립운동
중국 국민혁명의 지도자인 쑨원이 소련에서 파견된 요페와 회담하여 국공합작의 원칙에 합의하였다. 제 1차 국공합작의 목표는 군벌타도와 국민혁명의 완성이었으나 정치노선상의 대립으로 불안정하였다. 군사적 기반으로 생겨난 황포군관학교는 국공합작의 결실이었다. 한편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독립운동진영도 국공합작을 계기로 재정비를 모색하였다. 특히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국민정부측과 교섭하여 의열단원을 비롯한 한인청년 24명이 황포군관학교 4기생에 입교하였다. 그들은 국공대립을 목도하면서 민족문제와 이념문제의 혼돈스러움을 겪었지만 이 과정에서 ‘민족본위’의 진보적 사고를 체득하여 1920년대 후반기 민족협동전선운동 논리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협동전선운동의 필연성을 강조하였고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대동단결론’이 확산되었다.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한인들은 중국 국민당의 공산당 탄압과 남경국민정부의 소극적 항일노선에 실망하여 공산당에 가담하자 국민당정부는 한인들을 적대적인 존재로 평가해버렸다. 이는 약소민족 해방운동세력의 비애였고 이로 인해 해외 독립운동의 진보적 혁명역량을 소멸시켜버린 결과였다. 즉 국민당 정부 관할구역에서의 한인공산주의 세력은 활동기반을 상실해 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양상은 ‘친국민당정부’를 전제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좌파세력의 공존 및 대립구도를 그리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반발하자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며 국공 양당이 합작한다” 하여 제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장제스는 김구, 김원봉, 유자명을 여산으로 초치하여 한․중 연합항일전선의 구축과 이를 위한 재정지원을 제의하여 세 사람은 동의하였고 한인독립운동진영은 통합과 단결을 위한 노력을 배가하였다.
참고 자료
중국혁명 속 한국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