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조사
- 최초 등록일
- 2004.12.18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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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창건배경
2. 변천사
(1) 경복궁의 창건과 발전
3. 건물별 둘러보기
4. 복구논의
5.재건
6. 중건이후
본문내용
1. 창건배경
조선왕조는 1392년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나 태조가 즉위한 개경은 5백년 동안 고려의 도읍으로, 구 세력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에 걸맞는 도읍을 정하고 국정운영의 기틀을 다지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한양천도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게 한 뒤, 한양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같은 해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터를 정하고, 10월 25일 한양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왕조의 개국과 더불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주요한 국가적 시설물인 종묘와 사직, 궁궐을 짓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2. 변천사
(1) 경복궁의 창건과 발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주산인 백악(白岳, 표고 342.4m)의 남쪽에 임좌병향(壬坐丙向 ; 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景福宮)의 명칭은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큰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시경(詩經)> 기취(旣醉)편에서 전거를 찾을 수 있다. 즉 '왕조의 영원함과 큰복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1)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4. 복구논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자 1606년 11월에 경복궁 복구가 논의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고, 1616년 말과 1617년에도 중건이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중지되었다.
5.재건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