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왕부지
- 최초 등록일
- 2003.12.13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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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왕부지(王夫之, 1619 - 1692)는 자가 이농(而農), 호는 강재(姜齋)로 만년에 형양(衡陽) 석선산에서 살아 세칭 선산선생이라 하였는데, 호남 형양 사람이다. 부친과 형제가 모두 학문적 특징을 갖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7세에 이미 13경을 다 읽었다고 한다. 청년시대부터 정형세에 관심을 갖고 장사 안록산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행사와 광사에 참가하여 시정을 논하였다. 숭정 10년(1637)에 거인(擧人)이 된 다음 북경에 가서 회시에 참가하려 하였는데, 유구(流寇)의 난으로 시험이 실시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청병이 남하하자 형산으로 가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고 험준한 산을 넘어 광동 조경으로 가 남명의 계왕을 섬겼다. 그런데 영력 정권도 부패와 당쟁으로 항전파가 배척당하여 희망이 없게 되자, 왕부지는 은둔생활을 하기고 결심했다. 그리고 청이 강제적으로 시키는 변발을 피하고 옷도 만주족의 복장으로 바꿔 입으라는 민족 동화정책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청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요인(호남 서쪽에 거주)의 복장으로 바꿔입고 이름도 자칭 요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마직막으로 석선산으로 가 글로써 반청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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