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및 북한의 사회, 문화, 경제, 정치 그리고 이와 관련된 최근 이슈
- 최초 등록일
- 2014.12.17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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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남북한 분단의 역사
1. 일본의 패망과 38선
2. 자주적 독립 운동의 실패
3. 남북 정부의 수립
4. 한국전쟁
Ⅱ.남북한의 정치·경제·문화
1. 남한의 정치체제 및 외교 정책
2. 북한의 정치체제 및 외교정책
3. 남한의 경제
4. 북한의 경제
5. 남북한의 의식주 문화
Ⅲ.이슈로 보는 남북한
1. 탈북자 문제
2. 북한의 핵문제
3. 북한의 경제특구
4. 중국과 북한의 경제 협력
Ⅳ.남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
본문내용
Ⅰ.남북한 분단의 역사
1. 일본의 패망과 38선
일본제국이 연합국에 의해 두 발의 원자탄을 폭격당하자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미국과 소련은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으로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이남으로는 미군이 주둔하기로 합의하였다.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군대를 남하시켰으며 일본이 패방하자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9월 6일 미군은 서울에 주둔하여 즉각 군정을 실시하였다.
2. 자주적 독립운동의 실패
1944년 8월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건국동맹을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일본이 패망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미군이 주둔하기 전에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자 서둘러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당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고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중도 좌파인 허헌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요인이 참여하지 않은 점과 건국준비위원회 단계에서 대다수 우익 인사들이 참여를 철회한 점등의 약점이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실현하려한 노력은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의해 실패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친미적인 우익인사를 중심으로 한 정권의 수립을 위해 한국 민주당의 인사들과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한편, 38선 이북에서 소련은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는 않았으나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적 조직으로 재편하고 친 소련 성향의 김일성을 지도자로서 부각시켰다.
3. 남북 정부의 수립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증대를 먼저 고려한 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시 여론은 좌우 합작을 통한 중도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참고 자료
『김일성저작집 9』(평양조선노동당출판사, 1980), p.467
『주체의 사회주의 정치제도』(평양 ; 평양출판사, 1992), p.137.
20통일연구원, 『2009 북한개요』, p.183
사회과학출판사(평양), 『경제사전(2)』1985, p.208
김일성대학보 2006년 가을호
사회과학출판사(평양), 『경제사전(2)』1985, pp.715~716
통일연구원, 『2008년 북한경제 종합평가 및 2009년 전망』, 2009, pp.21~24 참조.
조선로동당출판사(평양), 『우리당의 선군시대 경제 사상해설』, 2005년 참조
최주환, 『북한경제분석론』(서울:대왕사, 2006
KOTRA, 2011 북한의 대외무역동향
양운철, “북한자원 개발을 둘러싼 북・중 전략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