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최승희
- 최초 등록일
- 2002.12.20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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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최승희의 일대기
최승희의 1930년~1937년까지의 작품경향
최승희의 춤에 대한 일본인들의 평가(사끼요시 나츠미, 오자끼 히로지)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
조선민족무용
최승희 춤의 평가와 고찰
최 승 희의 연보
본문내용
문화예술에 종사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는 최승희(崔承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 년 전에는 MBC드라마의 원작이 되기도 했던 최승희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용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더라도 그녀가 남북 조선 최고의 무용가 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다.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영광을 누렸던 사람은 무용계를 대표했던 최승희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울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동남아, 그리고 유럽에까지도 순회공연을 하는 등 그의 춤은 전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당대의 신문들이 동양의 무희 또는 세계적인 무용가라고 떠들어댄 것을 보더라도 그의 인기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1920년대라 하면 겨우 기생들이 서구식 극장인 원각사에 오르내리면서 판소리의 사이사이에 궁중정재를 축소한 춤이나 승무, 검무 정도를 추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 당시 우리나라의 무용계는 뿌리가 허약했던 당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최승희라는 예술가가 등장한 것이다.
일본의 많은 최승희 애호가나 작가 그리고 평론가들은 국제회의 때마다 북한 대표단에게 최승희의 일본 공연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59년 일본의 일조협회와 북한의 선정문화성의 금강차관과의 회담에서도 최승희의 일본 방문을 추진하였지만 결국은 성사되지 못했다. 표면상으로는 1백 여명 이상의 경비를 대달라든가 몸이 비대해져서 춤을 출 수 없다든가 하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또한 일본정부에서도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함으로써 이제 최승희는 무용계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1966년 이전에 나온 <조선예술>지나 <조선 중앙 년감>을 보면 최승희의 이름과 활동이 많이 나오다가, 1966년부터는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죽고 석 달이 지난 1994년 11월에 접어들자 뜻하지 않은 놀라운 정보가 발견되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최승희를 찬양하는 글이 나온 것이다. 문제의 사료는 1994년 5월 10일 조선 로동당 출판사에세 발행한 김일성 회고록 제5권 <세기와 더불어>이다. 김일성은 그 회고록을 1992년, 곧 팔십회 생일을 기념으로 하여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책의 오십오 페이지에 최승희를 언급하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