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최영
- 최초 등록일
- 2013.03.29
- 최종 저작일
- 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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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무장 최영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요동정벌론과 평가도 함께 있습니다.
목차
최영의 출생
무장이 출세하는 사회
무장으로서 최영의 활약
이인임의 득세와 실각
이루지 못한 요동정벌의 꿈
최영의 죽음과 우왕의 폐위
요동정벌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최영의 출생
최영은 고려시대의 명문집안인 철원최씨 동주(東州)최씨라고도 한다.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집안 출신으로 충숙왕 3년(1316)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직계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최영의 나이 16세 때 일찍 죽었다. 이때 아버지가 남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유훈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한다. 이후 최영은 본래 대표적인 문신집안이면서도 과거 등을 통하여 입신하지 않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무장의 길을 걸었다.
무장이 출세하는 사회
고려후기는 몽골과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맺고 이후 원의 간섭을 받았다. 따라 고려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고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몽고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반란으로 중국대륙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공민왕 3년(1354) 원나라의 군사지원 요청에 의한 무장들의 중국에서의 활약은 자연스럽게 무장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뒤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몰아낼 때에도 이들 무장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무엇보다 홍건적의 침입과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은 무장의 정치적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 최영은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하였고, 최고 지휘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무장으로서 최영의 활약
최영은 처음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 있으면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공민왕 원년(1352)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호군(護軍) 고려 시대에 둔, 정사품 무관의 벼슬.
으로 출세하였고, 공민왕 3년에는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357년에는 4백 여척의 왜선을 궤멸시키고 토벌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