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건국과 정통성
- 최초 등록일
- 2012.03.30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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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3장 대한민국의 건국의 역사와 북한에 비해 우월한 정통성에 대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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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났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미국이 위시한 자유주의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진영 간의 갈등이 생기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5년 2월 연합국 지도자들은 얄타회담을 열어 전쟁 후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회담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초 일본과의 전투에 돌입하면서 한반도 동북지역에 진입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군정을 펼쳤다. 해방 후 남한은 일본의 항복 후 미군이 진주하지 않은 공백상태에서 선점을 한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그 다음은 공산주의자들이 결집했는데, 이 두 세력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이다. 그렇지만 9월 8일 진주한 미군은 어떠한 조직의 정부적 성격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진주한 후 우파 정치세력도 결집하기 시작하였는데 한국민주당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 12월에 나누어 귀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영·미·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구체화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처음에는 좌·우파 할 것 없이 반대하였으나 좌파는 곧 입장을 바꾸어 신탁을 지지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미군정은 중간파 세력으로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신이 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지만 중간파 세력이 크지 못한 상태에서 합작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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