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사
- 최초 등록일
- 2011.04.27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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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흔히 1980년 5월, 당시 언론은 죽었었다고들 말한다. 이는 당시의 언론보도가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당시 광주사태의 실상을 다음과 같다고 본다.
목차
1. 서론
2. 어떻게 왜곡보도 되었는가
1) 조선일보
2) 동아일보
3) 경향신문
4) 종합적 논의
3. 결론
4. 참고문헌
5. 첨부자료
본문내용
1. 서론
흔히 1980년 5월, 당시 언론은 죽었었다고들 말한다. 이는 당시의 언론보도가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당시 광주사태의 실상을 다음과 같다고 본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정국이 불안정한 시기를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12월 12일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순식간에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해 국민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지속 확산되어 갔다. 그 동안 불만이 쌓인 전국의 학생 연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고,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여 죽는 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추격하던 군인들은 드디어 민간인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피하는 학생들을 감추어주고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민간인 부녀자도 사살당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광주시 외곽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하여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지키고 있어서 피신과정에서 체포 또는 사살 당하였다. 이에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합세하여 저항이 더욱 거세졌고, 일부 학생들은 도청(道廳)을 점거하고, 경찰서 등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