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2.05.21
- 최종 저작일
- 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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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배경
역사적 이슈
삼국통일 시기
본문내용
배경
김춘추와 연개소문은 둘다 정상적으로 정권을 잡지 않았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김춘추는 원래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의 아들이다. 그의 조부인 진지왕은 원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차남이었지만 거칠부의 추천으로 인해 왕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그 후 사도태후와 세종에 의해 왕권의 정상화 작업이 시행되고 이에 진지왕의 형인 진평왕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후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평은 세력을 많이 상실했고 그들의 자손인 김춘추도 당연히 어렵게 성장할 수 박에 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왔다. 진평왕이 왕위를 계속한 후에 귀족 세력들은 점점 성장하였고 무시 못할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진평왕은 왕권의 강화를 꾀하기 위해 동생의 아들인 용수를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 이에 재기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 후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의 권력자인 상대등 알천이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받으나 김춘추-김유신 연합을 두려워한 그는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이에 김춘추는 무열왕이란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연개소문은 원래 장수 출신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가 멸망하고 당이 세워졌다. 처음의 당은 고구려에 대한 우호적 관계를 취했다. 하지만 그 후 당 태종 이세민이 정권을 잡으면서 고구려에 대한 강경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