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고대한일관계 백제와 왜와의 관계
- 최초 등록일
- 2011.11.20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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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의 한일관계를 조사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백제 초기
-백제 중기
-백제 후기
일본국의 탄생
한일
광개토왕릉비문
일본서기
요약 및 고찰
결론
본문내용
백제와 왜와의 관계(역사적 관점)
백제 초기
1세기의 백제의 진출
첫째, 대방의 옛 땅인 남만주 금주지역의 외백제
둘째, 서산, 당진, 예산, 아산, 보령, 일대의 차령산맥 서쪽 지역
셋째, 차령 이남의 충남북, 전남북의 서남한 지역
넷째, 졍남 남부 지역
왜열도 진출
삼도로 건너간 백제의 세력들은 규슈의 야마토 지역에서 서기 100년경 백제인들의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나라 이름을 야마토라 하고 한문으로는 왜하고 표기했다. 이국가는 백제제국의 지배를 받는 담로국가였다.
2세기의 백제의 진출
서기 184년의 황건적의 난은 중원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 또, 서기 189년에는 한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중국대륙의 혼란을 틈타 백제의 수군은 양지강 상하구에 진출했다. 이와 같이 백제의 중국진출로 인해 왜열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신공여왕의 쿠테타와 그 이후의 6년간의 왕이 없는 상쟁기간 동안, 그리고 다물임나 국제전쟁에 본국정부인 곰나루백제는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백제의 왜 지배권 재확립과 관구검의 가우리 침공
중국대륙의 정세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고 십제왕실의 승계문제가 마무리되자, 백제대왕은 중국에 출정 중이던 해군을 서기 238년 철수시켜 왜의 야마토에 상륙시켰다. 신공여왕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던 위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나 위나라는 신공이 원하던 군사적 지원은 불가능했고 왜열도 상황을 정탐할 목적으로 군사 자문관 장정만을 파견했을 뿐이다.
신공의 거듭되는 친위 외교활동은 곰나루백제 왕실의 분노를 샀다. 백제왕실은 외백제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의 일부를 빼내어, 목라근자 장군의 지휘하에 왜의 야마토에 상륙시켰다. 백제육군 일부가 외백제에서 빠져 나가자 후방 위험을 덜 느낀 위나라가 서기 246년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가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동천대왕은 첫교전에서 승리한 후 자만하다가 패퇴하여 가우리는 1만 8천명의 병력을 잃고 수도가 관구검군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고 불질러졌다.
참고 자료
『고대한일관계사』,연민수 지음,혜안, 1998
『고대한일관계사』,김석형 지음,한마당, 1998
『백제사』, 문정창, 인간사, 1988
『백제사료집』,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