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13년경부터 권제ㆍ안지ㆍ남수문 등의 개찬으로 세종 24년에 완성되었다. ... - 세종 5년부터 6년까지 윤관ㆍ윤회가 8개월간 고려실록에 따라 사실의 직서에 중점을 두고 개찬한 「수교고려사」가 완성됨. ... 보통 ‘절요’라 하는 편년사는 본사 즉 기전체 사서의 연대별 요약이지만 절요는 고려사의 요약이 아니라 다른 사서인 「수교고려사」를 개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카하시는 이에 대해 회견 대상이 이에야스에서 히데타다로 바뀌는 과정에서 국서의 개찬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추측했다. ... 이 부분에서는 에도막부의 외교특징과 국서 위조, 개찬(改竄)의 발각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다. 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 조선 침략의 이유는 무엇인가? ... 일본의 뜻에 따라 회견 대상이 바뀐 만큼 막부도 개찬하는데 양해를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일 쌓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처분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국사는 태종 14년 5월 고려말의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고 하여 하륜 등에게 개찬이 명해졌다. ... 개찬 이유는 개국시의 일에 대한 기록이 왕에게 불만스러웠던 점, 정도전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하윤과 정도전과의 감정상의 대립 등이 있었다. ... 고려국사 개찬 작업은 태종 16년 하륜이 죽음으로써 완결을 보지 못했다. 고려국사의 사서로서의 성격은 첫째, 고려시대 전체의 역사를 완성한 첫 사서라는 점이다.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에서 고려사는 내용이 크게 보완되었다. 그 편찬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다. ... 그러나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강화되고 제칙(制勅), 태자(太子)등을 교(敎), 세자(世子)등으로 고치고 있어 이것도 반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개찬하게 되었다. ... ·환조(桓祖)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에 빠진 내용들을 발견하고, 1449년(세종 31) 정월 우찬성 김종서(金宗瑞),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