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체제와 비교
- 최초 등록일
- 2021.12.06
- 최종 저작일
-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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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체제와 비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고려사
1) 편찬주체 및 찬자
2) 구성형태와 특징
Ⅲ. 고려사절요
1) 편찬주체
2) 편찬체재
Ⅳ. 역사인식의 차이
Ⅴ. 결론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고려사
1) 편찬주체 및 찬자
고려사(高麗史)는 문종 원년(1451) 8월에 완성되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로부터 6달 후인 문종 2년(1452) 2월에 완성이 되었다. 세종 초년에 정도전의 고려국사를 개찬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계산하면 무려 30여 년이 지나서 완성될 만큼 만성(晩成)한 것과는 달리, 고려사절요는 6달만에 완성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가장 중요한 사유는 임금의 간섭유무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세종시대에 고려사가 만성(晩成)을 겪은 것은 수사관과 세종의 의견대립 때문이었다. 세종시대에는 수교고려사와 고려사대전이 6년과 24년에 각각 완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이를 기각함으로 완결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문종원년에 완성된 고려사도 만약 세종이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완결되었을지 확신을 가지기가 어렵다. 세종이 승하한 뒤에 완성된 고려사가 세종의 취향에 얼마나 적합한 사서가 되었을지가 의문이다. 그러나 고려사 전문에 대의 실풍어성재(悉稟於聖裁)라고 한 것을 보면, 수사의 기본원칙은 세종의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물론 세종은 본래 기전체(紀傳體)를 원하지 않았고 편년체(編年體)를 지지하였다. 고려사가 기전체로 결정된 것은 수사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수사관들이 기전체를 주장한 이유는 열전(列傳)을 갖고자 한데 있다. 이와 반대로 세종은 신하들의 열전보다도 군주와 왕실과 관련된 기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기전체를 찬성하지 않고 편년체를 지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게 기전체 방식의 편찬을 허락하였으나 군주중심의 내용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은 버리지 않았고, 그렇게 하여 완성된 고려사는 세종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된 사서로서 제작되었다.
다음으로는 고려사를 구성 하고 있는 본기, 열전, 지, 표가 누구로부터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 자료
변태섭, 1982, 고려사의 구성과 편찬원칙, 고려사의 연구, 삼영사
한영우, 1981,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비교, 조선전기사학연구, 서울대출판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