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육사상가 정약용의 교육에 관한 문제의식및 해결방안
- 최초 등록일
- 2008.06.02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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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교육사상가로서 다산정약용을 연구하고,
그의 사상에서 교육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목차
1.정약용의 전기
2. 시대와 사회, 인간에 대한 다산의 문제의식과 해결방법
3. 다산의 사상에서 교육과 관련된 핵심
본문내용
1. 정약용의 전기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의 모든 제도는 무너지고 백성의 삶은 궁핍해져, 기존의 체제나 사상으로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먹고 살게 하는 방법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에서 기존의 학문과 사상으로는 시대의 질곡을 풀어나갈 방법이 없다고 여기며 새로운 학문과 사상의 탐색에 몰두한 다산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활동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 하였다.
다산은 경기도의 광주군 마현 마을에서, 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후손이었다. 그분의 소생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는 모두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세 형제는 신유박해때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15세에 서울 회현동의 홍씨 가문으로 장가를 든 다산은 그 무렵부터 서울 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학자들과 어울리며 학문 연마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22세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정조를 만나게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연마에 노력하였다. 이 무렵부터 정조는 다산을 크게 성장할 신하로 믿고 총애를 하여 다산이 큰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28세에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한 다산은 정조의 총애와 신뢰 속에 승승장구 하였다. 초계문신으로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조를 보필하며 나라를 융성시키기 위한 온갖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다산은 31세에 벼슬아치라면 모두가 바라던 홍문관의 수찬이 되었으며, 부친상을 당해 집상 중이던 시기에 <성설城設>을 저작하여 수원의 화성을 축조할 설계도를 정조에게 바쳤다. 33세에는 홍무노간 교리라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벼슬에 오르고 암행어사에 발탁되어 경기도 북부지방 네 고을을 염찰하여 탐관오리들을 징치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34세에는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의 벼슬에 오르고 병조참의를 역임하나, 중국에서 입국한 주문모 신부 사건으로 충청도의 금정역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