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국외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내용과 성격
- 최초 등록일
- 2007.12.22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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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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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1930년대 중국관내 민족해방운동과 전선통일운동
3. 만주지역 해방운동의 변화와 민족통일 전선의 새로운 모색
1) 만주지역우파의 민족해방운동
2) 만주지역좌파의 민족해방운동
4. 결론
본문내용
1.서론
1930년대 일제 식민정책
- 정치면 : 각종악법을 제정,공포
- 경제면 : 수탈체제를 강화
대륙침략에 박차를 가함
2.1930년 중국 관내 상황
1.중국 관내 상황
1) 민족해방운동정당의 분립과 구성
① 사회주의자 → 구연흠,홍남표 등은 1929년 10월 유호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 조직.
② 우파 민족주의자 → 이동녕,안창호,김구를 비롯한 인물들 종래의 파벌 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조직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930년 1월 한국 독립당을 결성.
③ 조선의열단 →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은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제 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발표하고 민주국가의 건설, 평등한 경제조직의 건립, 지방자치제의 실시, 대지주의 토지몰수, 노농운동의 보장, 대 생산기관의 국영화 등 20개 조항의 강령을 채택.
전선통일의 모색
⇒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전선통일 및 중국과의 연대가 적극적으로 모색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성립
비조직 무장투쟁의 한계
개인폭력투쟁 노선은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방책은 될지언정 민족해방을 쟁취히기 위한 올바른 그리고 현실적인 노선은 될 수 없다는 한계 지님.
― 한국독립당과 한인애국단의 개인폭력투쟁 노선 → 외교독립 노선보다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무장투쟁노선으로 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는 한계지님.
⇒ 무장부대 간부와 대원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은 일차적인 과제
한인군관학교의 설립
― 김원봉 : 황포군관학교 4기 동기생인 서기등걸 등과 교섭하여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한인군관학교’ 설립허가 받음.
→ 1932년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불리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가 설립되었고, 그 운영은 교장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지도부가 담당.
조선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의 설립목표 : “조선의 절대독립, 만주국의 탈환
교육내용: 정치교육과 군사교육으로 구성.
1935년 9월까지 →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의 졸업생을 배출.
졸업생들은 주로 국내와 만주지역에 파견되어 조직확충, 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벌임.
― 김구: 1933년 봄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중국국민정부 주석 장개석과 회담을 갖고 한중합작의 항일공동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데 합의. → 낙양에 위치한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 제7분교에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한인군관학교를 설치하기로 합의.
→ 1933년 12월 중국육군중앙군관 학교 낙양분교 제 2총대 제 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 이른바 한인특별반이 설치.
한인 특별반의 교육목표 :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조선혁명에 필요한 간부를 양성하는 것.
교육내용 : 민족해방운동에 필요한 독자적인 군사교육을 강조.
참고 자료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론 연구>, 신주백, 새길, 1990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 일제파쇼하의 투쟁사례연구>, 竝木眞人, 거름, 1984
<1930년대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해방운동론>, 신주백, 역사비평 논문, 199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