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승려 겸익
- 최초 등록일
- 2007.12.1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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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 승려이자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도 구법승인 겸익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구법(求法)배경과 동기
3. 인도로의 구법활동
1) 여정
2) 인도에서의 구법활동
4. 귀국 후 활동과 영향
5. 백제불교와 계율(戒律)
6.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백제의 불교 수용 및 발전은 신라보다 앞섰지만 사료의 빈약함으로 구체적인 모습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백제의 불교 수용 시기에 대해서 5세기 후반인 동성왕 또는 6세기 초 무령왕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직접 인도로 가서 구법활동을 한 겸익(謙益)의 예는 이러한 의구심을 풀어주며, 당시 백제 불교의 발전을 짐작케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겸익은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인도로 유학을 떠난 백제의 승려이며, 백제 율종의 시조로 귀국 후 인도에서 가져온 계율서들을 통해 백제 불교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본인이 많은 승려들 중에서 특별히 겸익을 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백제의 경우, 겸익이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나기 전 시대인 100여년에 걸쳐 백제의 불교사에 관한 사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겸익을 통해, 겸익이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날 정도였으면 이전에도 백제의 불교가 어느 수준만큼은 알려지고 그만큼 확산이 되었다는 근거가 되므로 백제 불교의 초기 수용 모습까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직 백제 불교의 초기 수용 모습 단계까지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이만큼의 중요성을 가지는 겸익이기에 그를 논문의 주제로 택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겸익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기타 사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1917년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시기 조선사편수회 위원 활동을 하며 반민족행위를 한 이능화의 기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지적 받고 있어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때문에 겸익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하지만 겸익이 여느 승려들과는 다르게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도로 향하여 구법활동을 했다는 것과 귀국 후 그로 인하여 백제 불교 교단의 발전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통하여 볼 때 충분히 연구해볼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면 겸익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한 인물은 채인환(「겸익의 구율과 백제불교의 계율관」, 1983.)과 일본의 학자인 소옥대원(小玉大圓)이다.
참고 자료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上卷』-「미륵불광사사적」pp.33~34.
『三國史記』百濟本紀.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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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煐泰,『百濟佛敎思想硏究』, 동국대학교출판부, 1985.
부여군,『백제를 빛낸 인물』, 부여군, 2001.
심경순,「6세기 전반 謙益의 求法活動과 그 의미」『이대사원』권33·34, 梨大史學會, 2001.
안계현,「백제불교에 관한 제문제」『백제연구총서』4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4.
조경철,「백제 성왕대 유불정치이념 - 육후와 겸익을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Vol.15, 한국사상사학회, 2000.
채인환,「百濟佛敎 戒律思想 硏究」『불교학보』28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