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07.01.30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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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
리포트입니다.
좋은 목차와 생각거리 등으로 칭찬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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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 론
Ⅱ.본론
1. 광해군의 발자취
2. 부정적 고찰
3. 긍정적 고찰
4. 광해군, 한반도, 그리고 오늘
Ⅲ.결론
본문내용
오늘날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혁신 ․ 개혁을 외쳐대고 있다. 1등만이 살아남는다고 외치는 시대이고, 무한경쟁에, 성공 신화가 판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어쩌면 광해군은 맞지 않는 인물이다. 우선 광해군은 결과적으로 ‘패배자’였다. 쿠데타를 만나 왕위를 빼앗겨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그 이후에도 ‘폭군’, ‘패륜아’이라는 악명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광해군을 이야기하려 한다. 왜냐면 오늘날 현실이 그 당시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외세의 영향력과 내부문제가 엉키어 있던 임진왜란, 광세군 즉위 등으로 점철된 17세기 초반은 한미FTA, 북한의 핵 도발, 해외자본에 의한 한국경제 잠식 등 혼란스런 오늘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 17세 초반,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광해군을 다루는 것은 충분한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발제문은 먼저 역사적 측면에서, 광해군의 발자취를 총괄적으로 뒤돌아보려한다. 그런 그의 발자취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의 그와, 부정적 측면의 그를 끄집어내어 고찰해보았다. 그리고 이런 그에 대해 ‘광해군, 한반도, 현재’라는 주제로 현실적 접근을 해보았다.
Ⅱ. 본 론
1. 광해군의 발자취
1) 광해군의 출생과 소년기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어머니는 김희철의 딸이었는데 김희철은 사포서를 관리했다. 사포서는 왕실의 채소와 과수 등의 재배를 맡는 관청이었다. 외가가 이처럼 볼품없었다. 선조의 왕비는 의인왕후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여기서 밝혀진 사실 외에는 광해군의 유년기에 대해서 남겨진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 야서에 의할 수밖에 없다. 유년기에 광해군이 맞이한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죽음일 것이다. 광해군이 3살 되던 해 산후의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을 하였는데 이 사건은 광해군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광해군은 어머니의 그리움을 항상 느끼면서 자랐다. 광해군의 일기를 보면 광해군의 내성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항상 느끼면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친형인 임해군을 제외하면 이복 동생이 밑으로 12명이 있었다. 정비에서 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선조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음이 분명하다. 광해군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역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에 강연을 할 때에도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박학함을 과시했다고 한다.
참고 자료
1.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역사비평사. 2000
2.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박영규. 2004
3. 성공한 왕, 실패한 왕. 신봉승. 동방미디어. 2002
4. 교실밖 국사여행. 역사학연구소. 사계절출판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