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유물 조사
- 최초 등록일
- 2006.11.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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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유물을 조사한 레표트로써
전기중기후기의 시대구분과 유물들의 사진을 올려 놓았습니다.
목차
Ⅰ.가야의 시대 구분
1. 전기(3세기말․4C초〜5세기초): 임나가라(금관가야 중심체제)
2. 중기(5세기초〜6세기 전반) : 대가야(가라국) 중심체제
3. 후기(6세기 전반〜6세기 후반) : 가라국-안라국 중심체제
Ⅱ. 가야의 문화와 유물
1. 금관가야의 유물
2. 대가야의 유물
3. 아라가야의 유물
본문내용
Ⅰ.가야의 시대 구분
가야사는 일국사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국들을 내부에 포괄하고 있는 복합사이다. 그러므로 특정국의 성립 ▪발전▪소멸을 가야사로 대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가야를 구성한 국 모두의 변화를 종합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야사의 전개과정은 이를 대표하는 맹주국의 교체를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가야사회는 여러 지역 세력권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이 세력권에도 세력의 대소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세력권을 대표하는 세력 중에서 위세가 가장 큰 자가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 이런한 지역세력권 중에서 맹주국을 배출한 것은 김해의 금관국(금관가야)과 고령의 대가야였다. 그리고 함안의 안라국(아라가야)도 맹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기도 하였다. 가야사회에서의 맹주국은 특정 세력에 고정된 거이 아니라 힘의 우열에 의해 교체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맹주국의 변화를 중심으로 가야사의 전개과정을 시기 구분해 보면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1. 전기(3세기말․4C초〜5세기초): 임나가라(금관가야 중심체제)
이 시기는 가야사회가 성립되면서 김해의 금관가야가 연맹체를 이끌어 나간 시기이다. 금관가야가 이렇게 맹주국이 된 것은 그 전신인 구야국이 변한사회에서 가야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결과이다. 구야국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김해 세력이 지정학 조건을 최대한으로 살려 대외교역과 내륙 교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곧 김해지역이 대외교역의 중심기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김해지역에서 다른 어는 곳 보다도 왜계 유물이나 중국계 유물이 다수 나오는 것은 이러한 교역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가야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가야 문화 조사⌟, 가야대학교,1998
사진참조 : http://todori.inje.ac.kr/~k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