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광개토대왕릉비의 검토
- 최초 등록일
- 2006.04.26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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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 레포트입니다^^
물론 에이뿔 받았구요^-^
목차
Ⅰ. 머리말
Ⅱ. 광개토왕릉비의 硏究에 關하여
1. 능비(陵碑)가 발견되어 비문(碑文)이 공개되기까지
2. 비문 연구의 진전
3. 전후(戰後)의 비문 연구 - 李進熙의 비문변조설을 중심으로
4. 비문 연구의 문제점
Ⅲ. 광개토왕릉비의 內容에 關하여
1. 신묘년(辛卯年) 기사
2.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수묘제(守墓制)
3.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대외관계
Ⅳ. 광개토왕릉비의 世界性에 關하여
Ⅲ. 결론
본문내용
1. 신묘년(辛卯年) 기사
광개토대왕릉비의 1면 8행에서부터 9행에 걸쳐 기록된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비문 연구에서 매우 중시되어 온 부분이다. 그것은 이 신묘년 기사가 왜의 한반도 출병과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자료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지, 보이지 않는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여러 종류로 해석이 된다.
◈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新卯年來 渡海破百殘□□□羅 而爲辛民
① 일본학계의 연구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와 신라를 침략하여, 백제와 □□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이 해석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문장 판독상으로는 순조로운 해석으로 보이지만, 이 해석에서의 모순은 뒷부분까지 해석을 마쳤을 때 알 수 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 부분은 “그래서 영락 6년 병신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문장을 이어서 생각하면, 왜가 고구려의 신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는데 고구려가 백제만을 친다는 점은 논리상 어색하다.
② 정인보 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新卯年來 / 渡海破 / →渡海: 주어-고구려
→破: 목적어-왜
百殘□□□羅 / 而爲辛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주어:백제 →주어:백제 →주어:광개토대왕
→□□□=聯侵新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침입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이 때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에 침입하니, 백제는 원래 고구려의 신민이라 영락 6년 병신에 광개토대왕이 친히 백제를 정벌하였다.” 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짧은 문장 속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모순이 있다. (박시형 설과 유사)
참고 자료
손영종,《광개토왕릉 비문 연구》, 중심, 2001
안춘배,〈광개토대왕릉비문 연구(1)-비석의 문단과 해석을 중심으로〉,《고고역사학지》8, 동아대학교 박물관, 1992
이형구,〈광개토왕릉비 연구-소위 신묘전기사와 경자년기사를 중심으로〉《국사관론집》45, 국사편찬위원회, 1993
임기환,〈광개토왕비의 국연과 간연〉,《역사와 현실》13, 한국역사연구회, 1994
천관우,〈광개토왕의 정복활동〉,《한국사시민강좌》3, 일조각, 1987
이기동,〈廣開土王陵碑文에 보이는 百濟關係記事의 檢討〉,《百濟硏究》, 충남대학교 박물관,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