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다
- 최초 등록일
- 2017.03.29
- 최종 저작일
- 20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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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교를 재개하다
2.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한 일본
본문내용
1. 국교를 재개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게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에 임진왜란 이전과 같은 통교 관계를 화복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강화 교섭은 이외로 빨리 진행되었다.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도쿠가와 바쿠후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간청해오자, 조선은 바쿠후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은 쇄환하기 위해 일본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사명당 유정(惟政)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명을 되돌려 받은 뒤 ‘회답 겸 쇄환사’라는 외교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였다.(선조 1607) 광해군 원년(1609)에는 기유악조를 체결하여 일본 및 쓰시마 섬과의 통교 무역에 관한 틀을 마련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