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민족][북방민족과 정복왕조][북방민족과 요나라][북방민족과 진나라][북방민족과 여진족]북방민족과 정복왕조, 북방민족과 요나라, 북방민족과 진나라, 북방민족과 여진족
- 최초 등록일
- 2013.02.21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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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Ⅲ. 북방민족과 요나라
1. 태조의 북진정책
2. 제1차 란구
3. 제2차 란구
4. 제3차 란구
5. 그 후의 대 요 관계
Ⅳ. 북방민족과 진나라
Ⅴ. 북방민족과 여진족
1. 윤관의 원정전
2. 윤관의 9성 축조
3. 금과의 관계
본문내용
Ⅰ. 개요
208년 조조는 남하를 개시하여 형주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켰지만,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적벽(赤壁, 호북성 嘉魚縣 서쪽)에서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강남지역의 병합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유비는 익주(益州, 사천성)으로 달아나 유장(劉璋)을 대신해 성도(成都)에서 자립하였다. 손권은 형주를 유비에게 빼앗아 강남지역에 판도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천하는 삼분되었고, 정립의 태세가 갖추어졌다.
216년 조조는 업에서 위왕(魏王)으로 봉해져 사실상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지만 220년에 낙양에서 사망하였다. 조비(曹丕)가 뒤를 이어 낙양에서 선양의 형식으로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왕조를 세웠다. 문제는 경제적인 부나 가문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새로운 관리임용방식인 구품관인법을 시행하여 관료를 육성하려 하였지만, 이미 각지에서 기반을 굳힌 호족세력이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관직을 독점하였고, 황제권은 이에 따라 위축되었다. 이렇게 구품관인법을 계기로 관료기구에 편입되어 대대로 여러 가지 정치상의 특권을 획득한 일군의 호족들은 이후 명문(名門)?대족(大族)으로 성장하여 발언권을 강화해가면서 후일 문벌귀족의 선구를 이루었다.
< 중 략 >
Ⅴ. 북방민족과 여진족
1. 윤관의 원정전
여진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는 않다.先秦때 肅愼, 한, 삼국시대 때 邑婁, 後魏대의 勿吉, 隋唐대의 靺鞨등으로 불리다가 渤海 멸망이후부터 女眞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진족은 유목민족 그대로 소규모 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동북쪽 함경도 일대와 서북쪽 압록강 중안 일대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을 구분하여 전자를 東女眞, 또는 東蕃, 후자를 西女眞, 또는 西蕃으로 불렀다. 고려의 여진에 대한 정책은 끊임없는 懷柔와 脅迫이었다. 즉 고려에 협조하는 자는 관직을 제수 하거나, 생필품 등을 제공하였으며 협력하지 않은 자들은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많은 여진들이 항복하여 왔으나 또 많은 여진들이 끊임없이 침투해와 약탈을 해서 고려조정에 골칫덩이로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東女眞 海賊들의 海賊행위는 일본에 까지 미치어서 그 피해가 대단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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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주, 8세기말 발해의 천도와 북방민족관계, 고구려발해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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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명, 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 동북아역사재단, 2010
정병준 외 1명, 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