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황사영 백서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1.12.11
- 최종 저작일
- 2011.12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Ⅰ. 서론
Ⅱ.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Ⅲ. 신유박해의 전개
Ⅳ. 황사영의 백서사건
1. 황사영의 출생 및 입교와 신앙 활동
2. 신유박해의 발생과 황사영의 은둔
3. 황사영의 체포와 백서의 발각
Ⅴ. 정부박해에 대한 황사영의 대응과 황사영백서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
Ⅵ. 결론
본문내용
신유박해
-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중심으로 -
Ⅰ. 서론
신유년(1801) 11월 5일 역적을 처벌할 때 시행되던 형벌인 능지처사1)를 당한 27세의 한 천주교도가 있었다. 그는 당시 국가의 안위에 관련된 십악죄2) 중 ‘대역모반’이라는 죄명으로 능지처사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 정부의 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 배론의 한 토굴에서 작성한 백서로 인해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주목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가 바로 황사영이다. 황사영이 순교했을 당시의 나이가 발제자의 현재 나이와 동일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고 큰 도전이 되었다. 본 발제를 준비하면서 한국기독교사의 위대했던 인물이었던 황사영의 모습을 통해서 본인의 신앙을 비추어보고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본 발제는 황사영이란 인물의 일대기와 그가 작성한 백서로 인해서 불거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신유박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먼저는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된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과 그 가운데 있었던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좀 더 깊이 있게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응했던 황사영의 행동과 백서의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정조는 1791년 남인 계열의 천주교 신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폐제사’ 때문에 처형된 진산사건에 대해서 아무리 ‘사설’에 물든 자라도 “사람은 인간답게 취급하고 사서만 불태워야 한다”며 처형에 반대하였다. 정조는 서학을 사학으로 생각하였지만 “정학이 밝으면 사학은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유생들이 더욱 정학인 주자학에 전념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조야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진산사건에 대한 척사론적 여론의 강한 압박으로 인해 정조는 이 두 사람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 서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서양의 학문적 개념으로서의 서학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 ...(중략)
참고 자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上』, 574.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6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신개정판)』, 7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