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12.09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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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전공 대학원생이 작성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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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채호의 생애
제1기 수학기
제2기 국내 애국계몽운동기
제3기 국외 독립운동기
2. 신채호의 사상과 활동
제1기 독사신론
제2기 영웅 전기 저술물
제3기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
3.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단재 신채호 선생은 본관 高靈 필명은 錦頰山人·無涯生. 호 丹齋·一片丹生·丹生.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애국계몽운동과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민족정기를 환기하는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하여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이다.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사의 거목으로서 그는 남다른 기개와 포부, 투철한 독립의지를 가졌다. 국가의 위기를 신채호는 어떻게 인식했고 대응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채호의 생애
제 1기 수학기
1880년 12월 8일 할아버지 신성우의 처가인 충담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1887년 8세 때 형인 신재호와 할아버지가 차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음.
1893년 14세 때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고 詩文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몸이 병약함.
1896년 17세 때 조부를 따라 한학자인 진사 신승구를 방문하여 그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이듬 해 신기선에게서 한학을 배움.
1898년 19세 때 신기선의 추천으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참여, 12월 독립협회의 해산 무렵 독립협회에 가담한 이유로 투옥당했다가 얼마 뒤 석방
제 2기 국내 계몽운동기
1901년 석방 이후 서울에 거주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문동학원에 강사로 개화자강파의 입장에서 신교육운동을 전개.
1904년 25세 때 전국황무지개간허차약안이 조인되자 조소앙 등과 ‘항일성토문’ 작성하여 매국음모를 규탄.
1905년 2월 26세 때 合試에 入格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은 나아갈 바 아니라’하여 바로 사퇴.
같은 해 장지연의 초청으로 『皇城新聞』의 논설기자가 됨. 그러나 11월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인하여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 됨.
참고 자료
이홍식, 『國史大事典』, 백민사
신채호, 『朝鮮上古史』, 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이이화, 『이야기 인물 한국사 1 - 사상과 학문의 주역들』, 한길사, 1993
김성국.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아나키 환경 공동체』. 모색. 1996.
류지아. 「申采浩의 민중혁명론과 역사인식」 효원사학회, 역사와세계, 제35집 2009.6
이호룡. 「신채호의 아나키즘」. 역사학회, 역사학보, 제177집. 2003
신복룡.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동양정치사상사, 제7권 제1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