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오쿼캉저/오상훈·이개석·조병한 역, 『중국 사학사 (上)』, 풀빛, 1998. 요약
- 최초 등록일
- 2011.12.02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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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까오쿼캉저/오상훈·이개석·조병한 역, 『중국 사학사 (上)』, 풀빛,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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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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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고대 사학의 창시(은대~전국의 사학)
사학은 일정한 관점과 방법으로써 인류사회의 역사를 기술학 규명하는 학문으로써 문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문자의 출현과 발생으로부터 사학과 사관을 탐색할 수 있다.
중국 문자의 발생은 은대 갑골문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문자가 이미 있었지만, 갑골문은 문자의 기원을 탐색할 실질적 유물이 증명해 주고 있다. 갑골문은 체계적인 문자 계통을 가지며 그 숫자만 3,000자가 넘는다. 최소한 중국의 문자는 은대 초기 혹은 중기 무렵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자가 형성되는 방법은 처음에는 사물의 형상을 그려낸 상형문자의 형태였다. 그러나 언어 가운데 사물 이외에 그림으로 그려내기 어려운 인칭대명사 같은 경우는 기존의 상형문자를 빌려 음부(音符)를 만들어 기록했는데, 이를 가차자(假借字)라 한다. 또 가차로 표현할 수 없는 글자는 형성(形聲)자라 하여 가차자 옆에 사물을 나타내는 형부(刑府)를 덧붙였다. 갑골문에는 이러한 세 가지 형태의 글자가 모두 이미 갖춰져 있었으나 상형자가 가장 발달한 상태였고, 가차자가 증가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한자의 발전법칙이 상형→가차→형성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문자는 왜 창조된 것일까? 처음에 원시인들은 토템신앙에 기반하여 그림으로 사물의 형상을 본떠 기록함으로써 어떤 의사와 소망을 전달하고자 했고, 그것은 원시적인 사실기록방법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언어를 표현하는 부호라기보다는 도상에 가까웠다. 즉 이는 아직 사회에서의 의사교환 도구가 될 수 없었기에 사상의 표현, 전달이나 의견 교류에 한계가 많았다. 결국 도화가 문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선조들을 기리는 기록을 정확한 표현으로 자손에게 남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도화는 의사표현의 작용을 했고 그것이 언어와 결합해서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도구가 됨으로써 문자로 변화해 나간 것이다. 뿐만아니라 문자의 활용은 더 나아가 곧 사유제, 계급, 국가의 발생과도 관련된다.
이러한 문자의 발생을 바탕으로 사관의 발생을 추측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자연․조상 숭배를 통해 제사와 기도, 점복의 방식으로 신명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하늘과 사람의 매개체가 될 무축(巫祝)이 생겨났다. 이 때 무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을 대신해 답을 전해야 했으므로 씨족의 역사를 아는 지혜를 갖춰야 했다. 따라서 무축은 총명하고 누적된 지식을 말할 수 있는 동시에 권위를 가진 씨족장의 고문이나 씨족장을 겸하는 위치에 있었다. 무축은 강신(降神)과 복문(卜問)뿐 아니라 사실기록도 담당한다. 여기서 ‘사(史)’의 직무가 생겨난 것이다.
참고 자료
오상훈·이개석·조병한, 『중국 사학사 (上)』, 풀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