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 최초 등록일
- 2010.11.17
- 최종 저작일
-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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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회교육사를 공부하며
미국에서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을
당시의 레포트입니다.
목차
4.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1) 한미조약과 견미(遣美)사절단
참고 1) 신미양요
참고 2) 강화도조약
2)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참고 4) 대각성운동
3) 한국에 선교사 파송 결정
4)맥클레이의 방문과 알렌의 입국
참고 4) 갑신정변
【 토 의 주 제 】
본문내용
4.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1) 한미조약과 견미(遣美)사절단
구미(유럽과 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여 가장 먼저 국교를 맺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과의 관계는 제너럴 셔먼호사건(1866년)과 그 뒤를 이은 신미양요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지지만, 그 앞서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접촉의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866년 9월, 제너럴 셔먼호사건이 벌어진 후, 이 내용을 탐문하게 된 사람은 프랑스 신부 리델이었다. 그는 그 해 9월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 때에 통역관 겸 향도로서 프리모게호를 타고 강화도에 들어왔다. 인천 작약도 앞에서 정박하고 있을 때, 9월 22일 천주교도인 송운오의 내방을 받았다. 이때 송운오는 지난 번 평양의 대동강에서 국적미상의 이양선이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10월 3일 프랑스의 원정대가 즈푸(芝罘)에 돌아가자 리델은 이 소식을 전했고, 베도우즈 상사 즈푸지사의 와드맨은 이 사실을 톈진(天津) 본사에 알렸다. 이 소식은 곧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영사 모간 및 미국대리공사 윌리암즈에게 통보되어졌다.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탐색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 1867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1월 21일 전함 와추세트호의 함장 슈펠트가 제너럴 셔먼호와 선원들에 대한 탐문을 위해 즈푸를 출발하여 한국 해안지방에 이르러 한국인으로부터 제너럴 셔먼호의 소각과 선원의 몰살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이 해 4월에는 세난도어호가 파견되어 대동강 입구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두 차례에 걸친 문정을 통하여 미국 측은 제너럴 셔먼호사건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 측은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통하여 한국을 문책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수교와 통상을 체결하기 위한 기회를 잡고자 하였다. 청나라 주재공사 로우와 미국동양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1871년 5월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미국은 이 침략전쟁에서 그들이 뜻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자료
「교회교육사,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기독교교육과 남기봉, 이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