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고고학
- 최초 등록일
- 2009.12.16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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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낙랑 고고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시대개관 및 시기구분
-「樂浪」 조사현황&연구
1) 일제강점기의 조사 연구
2) 해방 후의 조사
3) 낙랑연구사
-낙랑 유적과 유물의 특징
-낙랑 사회경제 형태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대개관 및 시기구분
한반도 북부지역과 중국의 동북지역은 『사기』조선열전, 『삼국지』위서 동이전, 『후한서』등의 기록에서 보듯이 부여, 고구려, 읍루, 옥저, 예 등 여러 종족이 활동하던 무대였다. 기원전 2세기 대에 고조선은 예, 고구려 세력의 발흥으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으나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에는 한반도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그 북쪽 지역을 넓게 아우르고 세력을 떨쳤다. 이후 위만조선은 한을 배후에서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기원전 108년 경 한 무제에 패해 한의 사군이 그 고지에 설치된 것으로 문헌은 전한다. 그러나 고구려 등 지역 세력의 성장으로 기원전 82년경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요동으로 쫓겨나게 된다. 기원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속되었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구축되는 것은 기원후 313년 무렵인데,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의 동이제족들의 성장을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군현과의 상호관계라는 틀 속에서 설명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낙랑군의 강역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청천강에서 황해도에 이르렀는데, 기원전 82년에 진번·임둔군이 폐지되고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요동으로 이전된 이후의 대낙랑군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함경남도 지역까지 그 관할구역이 확대된 것으로 이해된다. 기원후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를 분할해 설치했다는 대방군은 재령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지역일 가능성이 높지만, 나머지 세 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임둔군은 동이현에 군치가 설치되었고 군내에는 15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함경남도에서 강원도에 걸치는 동해안 지역이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진번군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해방 전부터 2가지 설이 있었다. 在北說은 압록강 중류역이나 요동지역에 임둔군이 있었다고 보는 설인데, 최근 요서지역에서‘임둔태수장’ 의 봉니가 발견되어 요서지역에 임둔군이 있었다 판단하는 연구자도 있다. 재남설은 낙랑군의 남쪽 지역에 진번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참고 자료
국립중앙박물관,2001, 」『낙랑』
한국고고학회,2007,사회평론『한국고고학 강의』
김원용,1986,제3판,일지사『한국고고학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