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영화 몽타주
- 최초 등록일
- 2009.11.28
- 최종 저작일
- 2003.11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소비에트 영화와 몽타주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표현주의적 리얼리즘의 시작
몽타주 기법과 이론
표현주의적 리얼리즘의 쇠퇴
표현주의적 리얼리즘 영화 양식의 근원
본문내용
1917년에 많이 제작되었던 로마노프와 라스푸친 류의 터무니없는 영화들을 제외한다면 1017년 2월과 1919년 8월까지 (1917년 10월을 거쳐) 소비에트 영화는 러시아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1919년 8월 27일 모든 영화는 공산당 교육국의 감시하에 국영화되었고 수많은 논쟁을 거쳐 새로운 예술로 태어나야 할 형편이었다.
문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아무런 수단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18년 내전을 거치면서 모든 제작사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사설 영화사들은 그들의 기자재를 외국으로 빼돌리거나 헐값으로 암시자에 넘겨버렸다. 남아있는 필름도 없고 스튜디오들은 텅 빈 상태였다. 영화인들 중에서도 일부는 러시아를 떠났고 일부 즉 에르몰로프, 티세, 노비츠키, 레비츠키 등의 촬영사와 가르딘, 꿀레쇼프, 페레스티아니, 겔리아부즈스키 등의 감독은 혁명에 연루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다시 활성화할 사람들은 프세볼로드 뿌도프킨, 쥐가 볘르또프,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쉬쩨인, 등의 젊은 감독들이었다. 레닌 또한 영화부흥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국영화가 선포된지 바로 5일 후에 최초의 국립 영화학교가 문을 열게된다. 바로 이 학교의 상급반 학생들이 가르딘의 지휘하에 소비에트 최초의 장편영화 낫과 망치를 제작하게 된다. 티세가 촬영을 하고 당시 학생이었던 뿌도프킨 주연을 맡아 제작된 이 영화는 뚜렸단 방향설정이 없는데다 미흡한 면도 있었지만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상태로 1921년 빛을 보게 되었다.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 제작된 소비에트 영화는 다음과 같이 두 부류로 구분할수 있다.
르포 영화 : 내전의 진상을 담았지만 한 편의 서사시처럼 소개되었다.
선동영화 : 공산주의 사상을 유포하기 위한 선전용 영화. 이 영화들은 양분론적 사상에 기초를 두고 주로 단편으로 제작된 것들인데 내용이 단순하고 도식적이었으며 때로 시사 문제를 소재로 삼기도 했고, 극영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