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한성시대에 관한 논의
- 최초 등록일
- 2009.05.19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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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 초기 한성시대에 관한 논의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ⅰ) 백제의 건국 신화
ⅱ) 한성백제의 위치
ⅲ) 서울ㆍ경기도지역의 한성시대 백제 유적 및 유물
ⅳ) 초기 백제를 보는 세 가지 관점
ⅴ) 풍납토성과 한국 고대사 연구
Ⅲ.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백제(기원전 18년~서기 660년)의 역사는 한성시대(기원전 18년~서기 475년), 공주시대(서기 475~538년)와 부여시대(서기 538~660년)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에 따라 각 시대의 문화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며 도성의 변천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꾸어 말해 백제시대는 일반적으로 도읍의 변천 과정에 근거하여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의 세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도읍이란 결국 왕이 거주하는 왕성, 또는 왕성을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의 도성이 소재한 곳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시대는 크게 도성의 위치가 달라진 시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한 것이라 이해되며, 그러한 차원에서 백제 한성시대라는 의미는 곧, 한성을 도성으로 한 백제시대로 볼 수 있겠다
최근 고고학의 활발한 성과로 인해 백제시대의 도성의 변천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분야의 연구가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료 제시 및 다양한 논의와 검증과정 절차를 필요로 한다
본고에서는 백제의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한성시대 백제 도성의 변천을 살펴보고, 이 시대 백제의 주요유적이라 할 수 있는 사적 제11호 풍납동토성과 사적 제297호 몽촌토성, 사적 제243호 석촌동 고분군, 사적 제270호 방이동 고분군 등을 중심으로 백제 초기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관련하여 초기 백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풍납토성의 축조시기가 한국 고대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본 후, 이에 따른 올바른 역사관 정립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ⅰ) 백제의 건국 신화
문헌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부여 또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정권으로 주위의 마한[마한왕(馬韓王) 또는 서한왕(西韓王)이 통치]을 정복해 나가면서 조금씩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한강변에서 확인된 산성과 고분들은 백제의 세력확장을 대변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들이다.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기원전 18년~서기 28년)인데, 온조는 친부(親父) 주몽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왕자(琉璃王子, 고구려 제2대 왕)의 등장에 신분의 위협을 느껴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하북위례성[현 중랑천 근처로 추정되며,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옮긴 하남위례성은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동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했고, 형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했다.『삼국유사』에는 온조ㆍ비류 형제가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삼국사기』백제본기 별전 권 23에는 북부여의 제2대 왕인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로 나와 있다. 이러한 기록의 불일치는 우태의 부인이었던 친모 소서노가 주몽에게 개가(改嫁)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참고 자료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 2003.
◈ 최몽룡,『한국고고학ㆍ고대사의 신연구』, 주류성, 2006.
◈ 김태식,『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한국생활사박물관 04「백제생활관」』, 사계절, 2001.
< 참고사이트 >
◈ 문화재청 - http://www.cha.go.kr
◈ 한신대학교 박물관 -http://www.hsmuseu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