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1999.02.01
- 최종 저작일
- 19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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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생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1762(영조38)년 6월 16일 사시(巳時)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
리(京幾道 廣州郡 草阜面 馬峴里)즉 오늘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
재원(丁載遠)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으며,아명(兒名)은 귀농(歸農)이라 했다.
자는 미용(美鏞)또는 송보(松甫)이고,호는 사암(俟菴)인데,그 외에도 다산 (茶山),별초(別樵),자
하도인(紫霞道人)등이 있으며,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익호(謚號)는 문도(文度)이다.
다산은 부친에게서 글을 배웠고 부친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닦았다.4세에 천자문을 배
우기 시작하여 7세에는 오언한시(五言漢詩)이라는 시를 지었다.
10세에 때인 1771년 부터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의 교육을 받기 시작 했다.16세에는 처음으로
성호(星湖)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16세에는 처음으로 성호(星湖)이익(李瀷)의 글을 읽었으며,
정조(정조 7년 1783)22세에 소과 (小科)에 합격하여 경의 (經義)진사(進士)가 되었다
23세가 되던 해에는 율곡 (栗谷)의 학설에 대한 그의 소양이 정조(正祖)로부터 인정받았다.이무
렵 이벽(李蘗)을 통해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었으며,서양에 관한 사정을 들었다.
이후 관리로서의 길을 비교적 평탄히 걷던 그는 1795년 천주교를 포교 하던 청나라 신부 주문모
(周文謨)가 체포되자 이 사건에 연좌되어 충청도 금경찰방(金井擦訪)으로 좌천되었다.그후 다시
규장각(奎章閣)에 들어갔으나 반대파의 계속된 모함으로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라는
외적으로 밀려났다.1798년 내직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1800년 정조(正祖)가 사망하고 순조(純
祖)가 즉위 곧 그 일파와 함께 신서파(信西派)로서 지목되어 박해를 받다가 1801년 다른 자들과
함ㄲ께 투옥되어 그는 경상도 장기(張기)로 유배되었고 이어서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져서
이후 오랜 유배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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