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외활동 -5~6세기 중원과의 관계와 천하관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8.10.17
- 최종 저작일
- 2008.03
- 1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5~6세기 고구려의 가장 활발했던 대외활동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실질적인 대외활동의 범위와 통치지역을 연구해보고,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에 대하여 고찰해 봅니다.
목차
1. 서론
2. 5~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고구려의 천하관
2.1. 북연北燕의 멸망과정에서 나타난 고구려의 대외관계
2.2. 북위와의 관계
2.3. 남조南朝 및 유연柔然등 국가와의 관계
2.4. 5~6세기 국제 관계 성격의 규명
2.5. 고구려의 천하관
3.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五月中 高麗大王相公□新羅寐錦 世世爲願 女兄如弟 上下相知(和?)守天 東來之寐錦……
중원고구려비의 이 말은 고려대왕과 신라 매금이 형제처럼 상하 화합하여 함께 수천하자는 것이다. 수천이란 천도天道, 또는 천제의 뜻을 지켜 나가자는 의미다. 이때 수천의 일차적인 주체는 고구려왕이 되겠으며 신라왕은 고구려왕을 통해 이 천의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되겠다. 곧 천손국인 고구려를 중심으로 그 주변국들이 참여하여 하나의 상하 세계화된 국제질서를 이루어 공존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국제질서를 이룬 공간을 5세기 고구려인은 천하라고 하였다. 곧, 고구려인들의 천하였다.
3. 결론
5세기의 동아시아는 국제관계가 세력균형과 자소사대를 공존한 질서를 보이고 있다. 중국 왕조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동아시아의 차원에서 볼 때, 일국 중심의 세계 질서인 자소사대 체제를 상정한 조공․책봉 관계의 외투가 부분적으로 덮인 가운데 실제적으로 세력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 동아시아 제국간에 형성된 상하 관계는 그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다원적이었다. 고구려는 남․북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신라와 조공 관계를 이루었으며 북위에 한 차례 조공을 하기도 했던 부여를 예속국으로 두고 있었고, 일부 거란 및 말갈 집단을 휘하에 종속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유연과 함께 지두우의 분할을 도모하고, 실위에 철을 공급하면서 내몽고 동북부 지역에 세력을 뻗쳤다. 이 시기 평양은 동북아 지역 소국제적치권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굳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지배하기보다는 동방지역에서 고구려의 문화를 지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즉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구별되는 천하로 진출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갈 때, 고구려는 농경지대의 중심인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고구려 중심의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참고 자료
․ 高句麗의 大陸進出과 對外關係, 徐榮洙.
․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지음, 바다출판사, 1999.
․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지음, 사계절, 1999.
․ 고구려본기, 박영규지음, 웅진출판, 1997.
․ 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오순제지음, 다시, 2004.
․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지음, 창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