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정사의 기능
- 최초 등록일
- 2009.01.31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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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의 정사(精舍)는 사대부들이 개인수양이나 독서를 위한 강학처(講學處)로 이용했던 유교건축물이다. 본래 정사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석가모니 당시에 승가(僧家)가 기거하던 승원(僧院)이 ‘정사(精舍)’로 불린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불교적 영역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불당관련 시설 외에 일반대중들이 절에 올라와서 불교경전이나 성리학 등의 공부를 위한 별도의 시설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숭유정책과 관련하여 불교의 영역이었던 정사는 차츰 유교시설로서 서당·서재·서원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안동지방의 경우 우리나라 유학의 중심지로서 16세기를 기점으로 많은 정사가 건립되었고, 이러한 정사의 건립주체로는 풍산 류씨, 진성 이씨, 의성 김씨, 광산 김씨, 안동 권씨 등 안동부 내의 핵심 양반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중 풍산 류씨의 동성반촌(同姓班村)으로 알려진 하회마을은 이 무렵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에 의해, 한 문중에서 네 개의 정사를 건립함으로서 안동문화권에서 정사건립이 다른 지역보다 활발히 전개되었다. 하회마을 정사의 기능은 대략 세 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첫째로는 사랑(舍廊)으로서의 기능이다. 정사는 주로 남성들의 대외적인 교류의 장과 손님을 접대하거나 학문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남성 위주의 공간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사는 주거생활과 관련하여, 주거와는 별도로 떨어진 사랑채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선비로서의 사색과 독서를 위한 공간이자, 손님 접객과 풍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는 당시 겸암과 서애의 살림집은 한계가 있었다. 주거의 부족한 사랑공간들은 정사경영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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