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수용 이유와 반영 사례
- 최초 등록일
- 2007.06.02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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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풍수지리의 수용 이유와 풍수지리가 반영된 사례에 대해 조사한 자료입니다.
목차
※ 풍수지리설이 수용된 이유
※ 풍수지리가 반영된 사례조사
※ 풍수지리설의 영향
※ 기사
본문내용
※ 풍수지리설이 수용된 이유
우리 나라에는 고유의 풍수 지리설이 있었다. 여기에 삼국 통일 이후 중국의 풍수 이론이 전래되면서 중앙과 지방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호족 세력이 등장하면서 호족들이 자기 세력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널리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도선(827 ? - 898 ?)이다. 도선은 선종 9산문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문의 승려였다. 그는 전국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산수의 순함과 거스름을 정하고 명당을 제시하는 한편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를 남겼다고 한다. 그의 풍수 지리설은 왕건에게 적극 수용되어 정치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도선과는 달리 비보에 더욱 중점을 두었으며, 도참 사상과 연결하여 이를 변용시켰다. 비보설은 도참설과 연결되어 특정 지역을 중시한다거나, 혹은 반란을 일으킬 형세이거나 임금에게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민은 등용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옛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 풍수지리가 반영된 사례조사
- 훈요10조 :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의 수덕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배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었다.
-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 신등이 서경의 임원역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대명당)입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이에 옮기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조공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