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론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08.12.17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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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일신라론에 대한 간단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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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재 고등학교『국사』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 “이시기의 예술세계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 통일과 균형의 아름다움을 통해 불교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석굴암이다.”라고, 통일신라의 민족사적 의의와 그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통일신라’의 표상을 너무나 친숙하고 자명한 것이어서 그것의 역사적 기원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친숙한 ‘통일신라’의 표상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이러한 ‘통일신라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통일신라’라는 시대 구분은 신라인들의 ‘일통삼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에 들어와 발명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하야시에게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를 번역하여 갑오~광무개혁기 때 국사교과서 편찬에 활용했던 김택영, 현채 등을 통해 조선에 수용되었다.
하야시가 애초 나·당의 대립을 강조하는 2단계 통일론을 구상한 것은 당시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일본의 아시아연대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갑오~광무개혁정권은 이러한 하야시의 조선사 체계를 ‘국사’로서 수용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한 근대 조선의 ‘임나일본부설’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청만이 아니라 일본까지도 조선민족의 타자로 의식하는 ‘국사’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현채의 시각은 이후 부여-고구려족을 주체로 한 민족사를 주창한 신채호의「독사신록」(1908)에서 크게 비판받지만, 이조차도 현채의 책이 그만큼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더욱이 세키노 다다시 이래 제국 일본이라는 타자를 통해 통일신라의 문화가 세계적 문화로 극찬되고, 곧이어 석굴암의 발견, 금관총, 서봉총의 발굴이 이어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통일신라’는 조선문화의 근원이며, 민족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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