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의 민족주의
- 최초 등록일
- 2008.12.05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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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피히테의 시대적 인식과 함께
민족주의 고찰
목차
※피히테의 민족주의
1. 서론
2. 본론
-당시 독일의 상황
-피히테의 민족개념
-피히테의 교육
-피히테의 정치사상
3.결론
본문내용
1. 서론
피히테는 제 2기 민족주의 형성시기에 활동했던 사상가이다. 그는 칸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철학자로서 이름을 떨치지만 한편으로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이상을 주장한 사상가이다. 피히테의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1807년 12월 13일, 나폴레옹군의 군고(軍鼓)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고 그들의 행군 대열이 창밖으로 보이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독일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반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1808년 4월 20일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14회에 걸쳐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한 시간 동안, 피히테의 절규는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국가의 최악의 상황에 닥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의 민족주의는 진정한 애국심에서 나오는 민족주의인 것이다.
2. 본론
1) 당시 독일의 상황
-토지소유는 영주가 경영하고 농민은 영주에게 전적으로 예속
-> 자영농이 성장할 수 없고 시장경제 발생여건 미비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신분관계
-국내에서 정치적 혼란, 국외에서는 혁명적 분위기
-프러시아의 선전포고 -> 나폴레옹의 승리로 예나 점령, 베를린 입성
-1807년 6월 14일 빌헬름 3세가 프랑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강화 조약을 맺음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안으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일단락 짓고 밖으로는 세계의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에도 국내가 사분오열되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한편 프러시아는 혁명중에는 반혁명 동맹에 가담하여 프랑스와 사웠으나 1795년, 바젤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한 다음에는 엄정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득세한 나폴레옹이 프러시아의 중립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프러시아는 1806년, 나폴레옹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하나 패해 후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러한 절망적인 시기에 피히테는 프러시아의 수도 베를린에서『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강연을 한 것이다.
참고 자료
이수윤, 『서양지성사』, 법문사, 2000,
차기벽,『민족주의 원론』, 한길사, 1990
원준호,「애국심의 대상, 요소, 현실성에 관한 숙고」, 한국정치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