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이후 국민국가의 형성 - 교육제도와 군제 개편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2.10.31
- 최종 저작일
-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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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을 교육제도와 군제의 개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함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메이지 초기는 대체로 프랑스식 군대 형식을 채택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군사 개혁을 주장한 조슈번 출신의 무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를 병부대보(兵部大輔) 육-해군 부대신에 맞먹는 자리
에 임명하는 등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오무라는 이미 조슈번에서도 신분을 무시하고 국민 개병을 강조한 서구식 군사교리를 채택하였는데, 병부대보에 오른 이후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여 봉건적 무사 계급이 아닌 국민 개병과 징병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고, 육군은 프랑스를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오무라는 1869년 징병 제안에 분노한 사무라이 집단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었고, 메이지 초기 10년 간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와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메이지 신질서 속에서 구사족에게 주요한 역할을 보장하고자 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각 번의 무사들을 모든 친병(親兵)을 조직하며 근대적 국민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1869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생인 사이고 주도(西郷従道)와 함께 서구식 군대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공업발전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이를 일본에 적용하여 농업 국가인 일본을 공업, 군사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하였다. 귀국 후 야마가타는 육군경에 임명되었고 1873년, 그의 주장을 관철시켜 프로이센을 딴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징병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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