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측 비판
- 최초 등록일
- 2008.09.11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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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강의 리포트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측의 입장을 정리한 리포트입니다.
중국측의 주요 주장들을 도출해낸 후 그것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구성입니다.
목차
1. 사건의 발달
1.1. 역사왜곡의 표면화
1.2. 역사왜곡을 관통하는 논리
2. 동북공정의 주요내용과 한국측의 비판
2.1. 고조선사도 중국사인가
2.2. 고구려는 중국에서 발생한 지방정권인가
2.3. 중국 역대 왕조에 ‘신하’로 자처하였는가?
2.4. 고구려와 수 당 간의 70년 전쟁은 내전인가?
2.5.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는가?
2.6.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인가?
본문내용
중국측은 고구려는 멸망한 지 250년 후에 등장한 ‘왕씨고려(王氏高麗)’와 하등의 계승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의 활동범위는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고려는 신라의 옛 땅에서 건국한 것이지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두 나라의 민족 성분도 달라서 고려의 민족 성분은 고구려인이 위주가 아니며, 신라인과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漢人)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는 이론도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왕씨가 전한(前漢) 당시 낙랑군의 귀족임을 생각하면 한족(漢族)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으로 ‘왕씨고려’와 ‘조선’은 고구려와 기자조선을 ‘도용’한 정권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측 주장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 내세우는 역사적 근거는 이러하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은 대거 남하해서 송악(松嶽개성)이 고구려 유민의 중심 도시가 됐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궁예가 이 지방 고구려 유민 후손들을 기반으로 901년 ‘후고구려’(공식 국명 고려 高麗)를 세우고 송악에 도읍했다. 그러나 포학한 궁예가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명도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고치자, 송악의 고구려 유민 후손 세력은 궁예를 버리고 고구려 유민 직계인 왕건을 추대했다. 그 후 왕건은 918년 국호를 ‘고려’로 회복해 고려 왕조를 개창하여 수도를 송악으로 정했다.
왕건은 즉위 직후 그동안 폐허가 된 평양에 황해도 배천 연안 황주 봉산 등지의 주민을 이주시켜 평양을 재건하고 ‘서경’이라 이름하여 ‘양경(兩京)’체제를 만들었다. 왕건은 자손에게 남긴 ‘훈요십조’의5조에서 “서경은 아국(我國 고려)의 지맥의 근본이다.”라고 했는데 당시의 풍수설을 빌려 표현했지만 본뜻은 “고려의 근본은 고구려(평양)”임을 자손에게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이외의 역사적 사료들 중에도 고려의 뿌리가 고구려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 많다 신형식최규성 편저, 2004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중국의 ‘동북공정’ 무엇이 문제인가-』 백산자료원, p299 ~ 300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