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최초 등록일
- 2008.05.06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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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미술사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목 차 -
1. 머리말
2.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3. 일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과의 비교
4. 반가사유상의 전래과정과 신라에서의 유행
5. 맺음말
(사진자료 多포함)
목차
1. 머리말
2.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3. 일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과의 비교
4. 반가사유상의 전래과정과 신라에서의 유행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반가사유상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쪽 다리를 반대편의 무릎 위에 얹은 사유의 상으로 6세기부터 7세기 무렵 초기 불교 전래 시기의 삼국에서 만들어져, 삼국통일 초기까지만 유행했던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다.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반가양식과 사유양식을 합하여 부르는 말인데, 반가양식은 둥근의자에 걸터앉아 발하나(오른쪽)를 올려서 다른쪽 다리 무릎에 얹고있는 모습을 말하고, 사유양식은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모습을 말한다.
인도에서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반가사유상은,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를 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는 태자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역시 태자상으로 처음 들어왔으나 점차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이같은 불상이 용수보살이라고도 불리게 되었고, 우리 한반도의 삼국에 들어와서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그 보살상을 조성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륵불로 화현하기 전까지 하늘에서 수도하고 있는 보살을 말하는데, 미륵불은 아득히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메시아(救世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특히 통일을 이룩한 신라에서 백제나 고구려보다 이같은 반가사유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오늘날 전하는 대표적인 국보금동상 2구는 국보 78호, 83호 미륵반가사유상으로, 본고에서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다루고자 한다.
2.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그림-1)은, 국내 최대의 금동제 반가상으로 그 높이가 93.5㎝에 달하고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작품이다. 선덕여왕의 20세 전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추정되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이 금동상은 일제 초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은밀하게 약탈되어 곧 서울로 옮겨져 그 당시 문을 연 이왕가박물관에 매도한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 출토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하고 있으나, 경주 남산 서쪽 산록의 선방골 곧 배리 삼존 석불(보물 제 63호)이 서 있는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설을 가장 신빙성있게 본다.
참고 자료
김리나, 「한국 고대 불교조각 비교연구」, 문예출판사, 2003
김영주, 「한국불교미술사」, 솔출판사 1996
문명대, 「한국조각사」, 열화당, 1980
조요한, 「한국미의 조명」, 열화당, 1999
최완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대원사 2002
황수영, 「반가사유상」, 대원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