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문화유산답사기-불국사편-
- 최초 등록일
- 2008.04.23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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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불국사(상),(하)편을 요약정리하고,
느낀점도 적었어요.
목차
상-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얼굴
불국사 역대기와 사적의 허구
김대성 창건설의 의문
등등....
본문내용
양상에게 죽임을 당하고,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덕왕의 치세와 문화대통령
불국사,석불사,석가탑,다보탑,에밀레종,남산의 불상들,안압지 출토의 판불들 등, 국립경주박물관의 불상과 뛰어난 유물들은 전부 이시기의 것이었다. 경덕왕은 이러한 문화적 난숙속에 감지되는 불안과 위기를 느꼈는지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했다. 기틀을 확립하기위해 에밀레종을 만들었고, 아들을 얻기위한 대불사를 또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 무리한 토목공사는 국력을 쇠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불국사도 그의 때에 완성을 하지 못했다. 불국사는 이런 역사의 정점에서 세워졌던 것이다.
불국사의 안마당엔 꽃밭이 없습니다.
불국사는 삼국시대 이래 여러 가람배치중 하나뿐인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때의 절들은 대개 시내에 있었고, 회랑이 있었다. 후에 건축된 대웅전이나 극락전은 전당안이 예불공간 이었지만, 그땐 회랑안이 곧 성역이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목탑이 곧 성역이었던 것이다. 거기엔 당탑외엔 어떤 장식도 허용하지 않았다.그리고 중대신라 이후로는 주변의 산세가 회랑역할을 하게되고, 하대신라부터는 구산선문의 선종사찰이 심심산골에 개창되면서 절집은 엄격성보다도, 선종의 개방성이 요구되니, 점점 평지사찰에서 산지사찰로 옮겨갔다. 크고 작은 자연석들과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쌓아올린 석단의 짜임새의 안정과 율동,인공과 자연의 멋진 회화의 정서는 우리의 가슴을 즐겁게 한다.
불국사의 교리적 상징세계
서양중세의 교회당건축에서 평면의 기본은 십자가였다. 그리스형은 상하좌우의 길이가 똑같은 형이었고, 좌우보다 상하가 긴 것은 라틴형이었다. 그 상징체계를 도상학으로서 미술사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지만, 우리의 전통미술사학에는 아직 그런분이없다.
불국사의 석축은 곧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다. 정상은 수미산이고 범영루가 이를 보여준다. 108명이 앉을수 있었는데, 이것은 108번뇌를 의미한다.
참고 자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